“이게 어찌 된 일이오?” 이선배와 백영호는 한목소리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쓰러진 공작부인 옆으로 뛰어갔다. “빨리빨리…… 저 주홍빛 어릿광대를…… 들창으로…… 그 들창으로…….” 공작부인의 숨찬 목소리와 함께 그의 백랍(白蠟)처럼 흰 손가락이 활짝 열어젖힌 달빛 어린 창밖을 가리키며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 p.35
정란이 핸드백 속에서 꺼낸 한 장의 봉투는 새빨간, 타오르는 듯한 주홍빛이었다. ‘백정란 앞’이라고 쓰인 이 붉은 봉투에는 발신인의 주소와 성명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광화문국의 일부인(日附印, 날짜 도장)이 박혀 있을 뿐이었다. “빨간 봉투?” 문학수는 부리나케 봉투를 뜯었다. 편지지도 역시 핏빛 같은 주홍빛이었다. --- p.74
이처럼 신출귀몰한 복수귀 해월과 세계적인 무희 공작부인의 스캔들은 흥분과 엽기에 굶주려 있던 저널리스트들에게 불타는 공명심과 아울러 커다란 자극을 던져 주었다. 이처럼 신비하고 이처럼 무시무시한 복수 사건이야말로 탐정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으나, 이것이 탐정소설이 아니고 하나의 생생한 현실이란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실로 전대미문의 괴이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 p.141
“여기서 우리는 해월의 입장으로서, 그가 만일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이러한 때에 어떠한 행동을 취했겠는가를 생각해봅시다. 물론 그는 하늘로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며 땅으로 꺼지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은몽 씨의 눈을 속일 만큼 그렇게 훌륭한 변장을, 그런 긴급한 시간에 그리도 신속히 했을 리도 없을 것이 아닙니까?” --- p.379
“무슨 증거로…… 무슨 증거가 있기에 저에게 그렇게 실속 없는 원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거예요? 탐정의 입장으로선 그러한 공상을 논하여 한시 바삐 사건을 해결하고 싶겠지만, 저로선…… 저로선 너무도 억울한 누명이 아니에요?” --- p.403
“탐정의 혈관에는 피가 순환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는 비로소 깨달은 때문입니다. 탐정의 혈관에는 강철이 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