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엘렌 그리모
Nancy B. Reich / 번역: 정준호
엄밀히 말하면 사랑은 실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너'와 '나' 사이의 그리고 그들의 유일무일함에 대한 열정을 드러내는 두 존재 간의 역학 관계이다. 정확한 의미로 사랑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존재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개념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이 - 극심한 고통의 토로나 완벽한 기쁨의 전조가 아닌 열병과도 같은 계시이다 - 가장 강력한 정신적인 경험이자, 가장 심오한 지식이며, 경험을 통해서 나타나는 투명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아무리 미로와 같거나 폭풍이 몰아 치더라도 막다른 길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사랑한다"는 것이 욕망을 담아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축복 속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런 진입을 통해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한한 공간 속에 무한한 꿈을 실재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대와 함께라면" - 이 구절은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가 그들의 음악에서 표현했던 사랑에 대한 인상을 떠오르게 한다. 로베르트는 그의 아내가 음악 그 자체이기를 바랐고, 마찬가지로 클라라도 요하네스가 음악이기를 원했다. 브람스는 그의 두 친구가 그들의 음표와 인상을 통해 나타나듯이 그런 존재이길 바랐다. 이것이 바로 완전히 정복되기를 바라는 모든 이야기처럼 러브스토리가 가진 독특한 징표이다. 내면에서 엄청나게 큰 세계를 다루고 있는 음악가들을 통해 우리는 사랑이 틀림없는 선물이며,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향하는 가장 친밀한 자유임을 알게 된다. 그러한 법칙의 비밀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레퀴엠〉에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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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불러낼 수 있는 모든 내면의 자유를 가지고는
사랑의 자유를 늘릴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사랑 안에서 이것만 연습하면 된다.
각자의 길을 가도록 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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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요하네스 브람스의 관계는 음악사에서도 독특하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들의 작품에 잘 드러난다.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비크는 슈만이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스승인 프리드리히 비크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시절 처음 만났다. 슈만은 비크의 집에 하숙하면서, 그 가정의 활력과 지성을 경험했고, 어린 신동 클라라와 그녀의 두 남동생은 그를 무척 좋아했다. 슈만은 불행히 손가락 부상을 당하자 어린 클라라에게 자기 작품을 연주해 달라고 청한다. "너는 내 오른손이야"라고 그는 그녀에게 편지했다. 클라라는 열세 살 때부터 사적인 연주회와 콘서트 홀에서 슈만의 작품을 평단과 음악 애호가에게 소개하기 시작했고, 여생동안 이 일을 사명으로 삼았다.
그 시대의 다른 모든 피아니스트처럼 클라라도 작곡을 했고, 그녀의 작품은 열한 살 때 가진 첫 독주회 프로그램에도 들어 있다. 열네 살 때 그녀는 "콘서트 악장"을 작곡했고, 이것이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 7〉의 3악장이 되었다. 그녀는 슈만에게 이 곡을 오케스트레이션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스스로 다른 두 악장을 완성해 오케스트레이션하고 전체 작품을 열여섯 살 되던 해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초연했다. 로베르트 슈만은 결혼한 지 5년째 되면 1845년에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 Op 54〉를 완성했다. 여기에는 클라라의 많은 생각이 녹아 있었다. 그녀는 그 해 12월 4일 드레스덴에서 호프카펠레(바로 이 음반 녹음에 참여한 악단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슈타츠카펠레로 이름을 바꿨다)와 이 곡을 초연했다. 이후 그녀는 긴 콘서트 이력 동안 유럽과 영국을 돌며 50차례 이상 이 곡을 연주했다.
두 사람의 가곡도 물론 긴밀한 연관이 있다. 결혼 전부터 두 작곡가는 함께 쓰는 공책에 곡을 붙일 시를 적어 두었다. 그는 그녀의 작곡 능력에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에 1839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의 이름으로 많은 작품을 출판할 것입니다. 후손들은 한마음 한뜻이 된 우리의 작품 중 어느 것이 내 것이고 어느 것이 당신 것인지 알지 못할 겁니다.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1840년 9월 결혼하자마자 슈만은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사랑의 봄』 중 많은 시에 곡을 붙일 마음을 먹고 클라라와 함께 작업한다. 이 노래들은 - 그가 작곡한 〈Op 37〉과 그녀의 〈Op 12〉 - 작곡가를 표시하지 않고 출판되었다. 놀랍게도 "왜 다른 사람에게 물으려 하는지 Warum willst du and're fragen"을 포함한 그녀의 많은 가곡이 저명한 평론가에게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슈만은 그녀가 1940년 크리스마스에 자신에게 선물로 작곡해 준 "물가에서 Am Strande"를 그가 편집장으로 있던 『음악신보』에 소개할 부록 음악으로 골랐다.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동안 그녀는 레슨과 콘서트, 작곡으로 계속 돈을 벌었다. 그러면서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결혼 후 10년이 지나 그들은 슈만이 처음으로 정규 급여를 받게되어 뒤셀도르프로 이주했다. 그가 마흔 살 때 일이다.
1853년 9월 슈만 부부는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맞는다. 그는 요하네스 브람스라는 이름의 20세 청년으로 슈만 작품의 열렬한 찬미자였다. 그가 자신의 곡 몇을 그들 앞에게 연주하자 엄청난 열광과 흥분이 잇따랐다. 슈만의 자신의 일기에 그를 "천재"라고 썼고, 『음악신보』에 기고한 기사를 통해 "미의 여신과 영웅들이 그의 요람을 지켜보고 있는 청년"이라고 소개하며 출판업자들에게 편지를 냈다. 그리고 클라라는 슈만의 작품이 대중 앞에 선보이기 전 먼저 그를 이해하고 감상했듯이, 브람스의 음악에도 똑같은 이해로 다가갔으며, 그를 고무하고 용기를 주었고, 연주나 작곡 이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여섯 달 뒤 정신 질환을 앓던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을 기도했고, 그는 남은 2년 반의 생애를 정신 병원에서 보낸다. 그때 이미 클라라에게 - 그보다 열세 살이 많았다 - 매료된 브람스는 뒤셀도르프로 가서 곤경에 처한 그녀를 도왔다. 의사는 클라라가 남편을 자극할 위험이 있으니 병원을 방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브람스같은 친구가 슈만을 방문하고 그 상태를 클라라에게 전했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연주 여행을 떠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있었다. 그는 가계부를 정리했으며, 슈만의 서재에서 책과 악보를 봤다. 이를 통해 그는 로베르트와 클라라의 음악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출판사에 작품을 보내기 전에 젊은 작곡가는 먼저 클라라에게 악보를 보내 조언과 비판, 재검증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브람스는 이전에도 친구들에게 출판 전에 악보를 먼저 보냈지만, 이때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오직 클라라만이 - 그녀의 판단만이 그에게 신뢰를 주었다 - 죽을 때까지 그의 작품에 의견을 말하게 되었다.
친밀한 교분은 유지되었으나 해가 갈수록 그 모습도 바뀌었다. 클라라는 어머니이자, 누이이며, 재정 조언자이자, 음악적 동료였다. 그는 5년 간 사랑에 빠진 젊은이로 그녀 곁에 있었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그녀가 아이들, 특히 아들들과 문제가 있을 때 조언자로 역할을 했다. 또한 클라라가 자녀들과 손주들을 부양하느라 힘들 때 경제적인 도움도 주었고, 장성한 세 자녀가 죽었을 때 위로해 주었으며, 그녀가 슈만 전집의 출판을 준비하는 엄청난 일에 직면했을 때 조언자이자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비록 한 동안 의견을 달리 하던 - 때로는 극심하게 - 때도 있었지만 친밀한 우정은 그녀가 죽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로베르트가 죽은 직후에 쓴 일기의 앞부분에서 클라라 슈만은 브람스에 대해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는 진실한 친구로 내 슬픔을 함께 나눠주었다. 그는 상처받은 마음에 힘을 주었고, 내 마음을 추스르며, 영혼을 밝혀 주었다. 한 마디로 그는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슈만의 음악 출판을 놓고 오랜 동안 논쟁을 한 끝에 브람스는 그녀의 일흔세 번째 생일에 이렇게 편지했다.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얘기합니다만, 그는 언제나 존경심을 가지고 당신을 대했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던 - 당신에게 사랑과 선의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합니다. 당신 그리고 부군과 지낸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이었고, 가장 위대한 보물과 가장 숭고한 순간을 담고 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