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부처님은 윤회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
답 : 부처님 역시 윤회를 가르치십니다. 윤회가 부정되면 불교 전체가 부정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을 때 세 가지 신통력이 열렸다고 하는데 첫째는 숙명통(宿命通)이고, 둘째는 천안통(天眼通)이고 셋째는 누진통(漏盡通)입니다. 이를 삼명(三明)이라고 부릅니다. 삼명 가운데 숙명통과 천안통은 윤회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숙명통은 자신의 전생을 모두 기억하는 신통력이고, 천안통은 다른 생명체의 전생과 현생의 관계를 모두 알고, 내생을 예측하는 능력입니다. 숙명통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인과응보의 연기법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자각하게 되고, 천안통을 통해서 인과응보와 연기의 법칙이 다른 생명체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보편법칙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보편법칙을 알게 됨으로써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누진통을 얻습니다.
현대불교학은 서구에서 발생한 인문학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초창기 서구의 불교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불교를 비판하기 위해 불교를 연구했기에 기독교적 세계관에 맞지 않는 불교의 신비한 교리들은 모두 잘라버린 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교리만을 추출하여 불교라고 규정해 왔습니다. 만일 윤회를 부정한다면, 초기불전의 2/3 이상이 모두 폐기되어야 합니다. 윤회를 부정하면 모든 불교 수행은 무의미해집니다. 왜냐하면 불교수행이 지향하는 열반, 해탈이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서구불교학자들은 신앙이 아니라 인문학적 호기심으로 불교를 연구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신앙과 수행의 불교학’이 새롭게 탄생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불교학을 체계불학(Systematic Buddhology)이라고 부릅니다.
- 본문 중 36번째 질문과 답(본문 171쪽~172쪽)
문: 채식도 살생 아닙니까?
답: 불교의 계율은 절대 절명의 지상명령이 아닙니다.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경우, 미래에 언젠가 괴로운 과보를 받는다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율을 어길 경우에도, 그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어긴 다음의 참회 여부에 따라, 계를 어길 때의 마음가짐(삼독심의 유무) 등등에 따라 그에 대한 과보가 달라집니다.
삼귀의 후에 오계를 받는 것이 일반적인 불자 입문의식이지만, 오계를 받지 않고 삼귀의만 다짐해도 불자로 인정됩니다. 오계의 경우도 모두 받지 않고 일부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바새오계경』이나 『대지도론』에서는 수계 정도에 따라 재가불자의 수준을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일분행자(一分行者): 오계 가운데 한 가지 계만 받고 지키고자 하는 재가불자
소분행자(少分行者): 오계 가운데 두세 가지 계만 받아 지키고자 하는 재가불자
다분행자(多分行者): 오계 가운데 네 가지 계만 받아서 지키고자 하는 재가불자
만행자(滿行者): 오계 모두를 받아서 지키고자 하는 재가불자
단음행자(斷淫行者): 오계 모두 지키면서 부부생활의 음행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재가불자
예를 들어 생선회집을 운영하는 분의 경우 ‘불살생계’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회사업무로 술을 마셔야 하는 분은 ‘불음주계’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장사를 하기에 거짓말을 많이 하는 분은 ‘불망어계’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수계식 때에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계목에 대해서 복창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지키겠다고 서원한 계목은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그럴 경우, 미래나 내생 언젠가 오계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직업이나 상황 속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상과 같은 가르침에 의거할 때, 가능하면 채식을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맞게 원만하게 식사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채식을 하는 것이 옳고, 미래나 내생에 언젠가 채식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는 ‘보리심의 새싹’ 홈페이지로 들어가 보시면 채식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식물도 생명이기에 이를 먹는 것과 고기 먹는 것이 다를 게 없다는 얘기를 쓰셨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의거하면 식물은 중생에 속하지 않습니다. 생명과 중생이 동의어라고 할 때, 불교적 관점에서 식물은 생명이 아닙니다. 윤회의 세계인 삼계, 육도 그 어디에도 식물의 세계는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식물은 DNA로 이루어진 세포 덩어리일 뿐입니다. DNA와 세포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지, 수, 화, 풍 사대에 식(識)이 부착되어 있어야 중생입니다. 다시 말해 ‘고기 덩어리’인 육체에 중음신(中陰身), 또는 귀신이 오버랩 되어야 중생입니다. 통도사 극락암에 주석하셨던 경봉(?峰: 1892~1982) 스님께서는 식물을 우리의 손톱이나 머리칼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식물이 중생에 속하지는 않지만 중생의 거주처(居住處) 역할을 하기에 율장에서는 풀을 함부로 베거나 나무를 함부로 잘라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식물 속에 살고 있는 중생(벌레 등의 미물)을 해칠 수가 있고, 다른 중생의 거주처를 빼앗는 꼴(투도)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율장을 보면 괴생종계(壞生種戒)라고 해서, 스님이 과일을 드시려고 할 때, 정인(淨人)이라는 사찰 내의 재가불자가 과일에 칼로 흠집을 낸 후 스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과일을 미리 ‘죽이는’ 시늉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과일이 생명이기 때문이 아니라 승가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식물도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자이나교도(Jaina敎徒)의 비방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식물의 경우 음악을 틀어주면서 키울 경우 잘 자라고, 해치려고 할 경우 반응을 한다는 실험에 근거하여 식물도 생명 아닌가 묻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광물인 ‘물(水)’의 경우도 컵에 떠 놓은 후 좋은 마음을 보내주면 질이 좋은 육각수로 변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식물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광물도 반응합니다. 다시 말해 온 세상이 사람의 마음가짐에 대해 반응합니다. ‘모든 것이 생명’이라든지[華嚴], “그 어떤 것도 생명이랄 게 없다.”[般若]는 무차별적인 조망은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는 지침이 될 수 없습니다.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고, 그에 의거하여 살생하지 말라는 윤리적 지침을 제시하는 것은 철저한 속제의 일이고 분별적 활동입니다. 불교윤리적으로 ‘분별’할 때 식물은 불교적 의미의 생명, 즉 중생이 아니기에 식물을 먹거나 해치는 것은 살생이 아닙니다.
- 본문 중 67번째 질문과 답(279쪽~283쪽)
문: 불자가 아닌 사람이 불교의 계율을 어길 경우 그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까?
답 : 불교윤리는 계(戒)와 율(律)로 구분되는데, 계는 자율적이고 율은 타율적이라고 합니다.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를 초래하는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선악을 판가름 하는 기준이 계이고, 승가에서 생활하시는 스님들의 행동 규범이 율입니다.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지만 현대용어로 풀어 말하면 계는 ‘윤리[Ethics]나 도덕[Moral]’에 해당하고, 율은 ‘법[Law]’에 해당합니다. 계에서는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이 모두 문제가 되지만, 율에서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만 문제로 삼습니다.
계는 부처님의 명령이 아니라 연기(緣起)의 세계,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발견된 이법(理法)으로서의 윤리이며, 선악의 기준이기에 불교신자든 아니든 계에 어긋난 행동을 할 경우 괴로움의 과보를 받게 됩니다. ‘남을 해치는 행동’ 또는 남과는 무관하더라도 ‘고결하지 못한 행동’이 계에 어긋난 행동입니다.
그러나 율의 경우는 다릅니다. 비구 스님의 250계와 비구니 스님의 348계가 율의 조목들입니다. 율의 경우는 스님들에게만 해당됩니다. 타종교인은 물론이고 재가불자에게도 해당되지 않습니다. 승단의 규범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계는 타종교인, 재가불자는 물론이고 무종교인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입니다. 그 어떤 종교를 믿든 계를 어길 경우 괴로운 미래가 초래되고 잘 지킬 경우 행복한 미래를 맞이합니다.
- 본문 중 74번째 질문과 답(303쪽~304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