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없지만 차마 그 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그 일이 엄연히 내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길을 잃게 된 시발점이 되었으니까.
설명하기 쉽지는 않지만 그 일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었다. 여자들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한 경우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하게 마련이다. 나와 비슷한 일을 당한 여성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비슷한 일을 당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아무리 설명해줘도 그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깊고 쓰라릴지 쉽게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그날 이후, 내 대신 몸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이해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기에 모두들 쉽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내 몸속으로 들어온 그 누군가는 빈 껍질만 남을 때까지 원래의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차라리 아예 죽여주기를 바랐지만 내 소망은 묵살되었다. 난 자비라는 감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오래 전에 잊었다.
그날, 나는 죽음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대신 살아남았다. 아니, 그날 내 대신 걷고 말하는 누군가가 다시 태어났다. --- pp.7-8
귀금속점 여주인은 자신이 권한 목걸이가 그 여자 손님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모든 여자들에게 삼백만 유로짜리 목걸이를 걸고 다닐 자격이 부여되는 건 아니었다. 우아한 드레스를 몸에 두르고 있었지만 그 여자는 상류층에 발을 들여놓은 지 그리 오래 돼 보이지는 않았다. 부유한 집안 여자들을 주로 상대해온 보석상 여주인은 그런 미세한 차이까지도 예리하게 감지해낼 수 있었다. 경험상 처음부터 부유한 집에서 나고 자란 부류와 이제 막 그 대열에 합류한 부류를 구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젊은 여자의 눈빛에서는 반항적인 기질이 다분히 느껴졌다. 야성적이고 동물적인 느낌이었다. 젊은 여자와 동행한 사십대 남자 역시 부유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르마니 정장 차림에 손목에 오데마 피게를 차고 있었지만 건달기를 다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 pp.9-10
그 순간, 기다리던 아이가 교문 밖으로 나왔다.
바람에 나부끼는 긴 금발머리, 천진난만한 미소, 해맑은 웃음소리를 가진 아이의 이름은 제시카였다. 그는 제시카를 발견한 순간 가슴이 설레며 자기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다가 만난 아이와의 재회라 더욱 반가웠다.
제시카,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를 거야.
조만간 노리개가 될 아이, 영혼 없는 존재가 될 아이, 욕망의 재단에 올려질 아이, 갈증을 해갈해주는 샘물이 되어줄 아이.
그는 아이와 50여 미터쯤 거리를 두고 뒤따라 걸었다. 아이는 오늘따라 혼자가 아니라 밤색머리 친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p.83
엄마 아빠가 그토록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지름길을 이용한 벌을 받은 거야. 잠깐이나마 가출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바람에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몰라. 남동생을 질투하고 미워했던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지. 차라리 외동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벌, 남동생 대신 오렐리 같은 자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벌, 할머니에게 심한 말대꾸를 한 벌, 자주 거짓말을 한 벌을 받은 거야.
제시카는 부모를 생각하며 숨이 막힐 정도로 펑펑 울었다. 오렐리도 함께 울었다. 밤이 되면서 추위가 밀어닥쳐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오렐리는 엉뚱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말라비는 이제 누가 돌봐주지?
말라비는 열네 살 때 생일선물로 받은 토끼 이름이었다.
내가 없다고 말라비를 버리지는 않겠지?
납치범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고 있었다. 제시카와 오렐리의 귀에도 익숙한 노래였지만 두 아이는 따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다시 즐겁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이 있을까?
‘너도 알잖아. 우린 아직 죽기엔 이른 나이라는 걸……. 알다시피, 우린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니야. 투 영 투 다이, 베이비.’ --- pp.161-162
가끔 보름달이 뜨고 대지가 하늘을 향해 짙푸른 연무를 쏟아내는 밤이면 나는 창밖을 바라보다 그 아이들을 발견하곤 한다. 그 아이들은 연못과 멀지 않은 숲 주변에 몰려 서 있다. 그 아이들은 여명이 밝아오기 전 자신들이 갈 길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 헤매고 있다. 그 아이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왜 숲 주변에서 헤매고 있는지 그 이유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자리에 모여들어 집을 향해 걸어와 현관문을 열어젖히려고 한다.
그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문을 흔들어대지만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문을 열어달라고 위협하지만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그 아이들이 날 비난하지만 난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난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고한 천사들이 땅 속에서 일어나 천국을 찾아 떠돌고 있다.
그 아이들에게 천국은 어디에도 없다고 입이 닳도록 설명해줘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뿐이다.
아이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아무도 내 말에 귀기울여주지 않는다. --- pp.234-235
라파엘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지금껏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왔지만 사람을 죽인 경우는 없었다. 프레드를 죽인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는 파트릭 같은 인간을 증오했다.
이제 남아 있는 건 파트릭에 대한 증오심밖에 없었다. 교도소에 있을 당시 그를 끝까지 버티게 해준 힘은 증오심이었다. 교도소에 갇히게 만든 사회에 대한 증오, 교도관에 대한 증오, 인간이 만들어놓은 법에 대한 증오, 복종에 대한 증오, 굴욕에 대한 증오, 비열한 짓에 대한 증오가 그를 출소할 때까지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
파트릭 같은 미치광이의 먹잇감이 될 수는 없어.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단 하루도 증오심을 품지 않은 날이 없었다. 증오심은 그의 척추였고,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었다. --- p.291
라파엘은 어쩔 수 없이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는 현관문 앞에 서서 머리를 쓸어 올린 다음 셔츠의 단추를 단정하게 채우고 나서 문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너무나 그리웠던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 라파엘입니다.”
엄마가 손에 행주를 든 채 문을 열었다.
두 모자는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 움직일 것인가?
누가 먼저 다가갈 것인가?
결국 엄마가 먼저 아들에게로 다가와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라파엘은 그제야 두 팔로 엄마를 마주 안아주며 지난 시절의 아이로 돌아갔다.
라파엘은 엄마 앞에서도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엄마를 다시 볼 수 있게 돼 정말 좋아요.”
“아파트 아래에서 네 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혹시 못 봤니?”
“길이 어긋났나 봐요.”
그 순간 등 뒤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앙토니와 윌리암이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라파엘에게 달려들어 포옹을 한 다음 마치 형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영웅이라도 되듯 감탄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 pp.314-315
상드라는 연못가 벤치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수면 위에 떠도는 나뭇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나뭇조각은 마치 난파선처럼 오도 가도 못하고 연못 위를 떠돌고 있었다.
상드라는 그 나뭇조각이 자신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못을 떠돌며 차츰 썩어가다 작은 가루가 되어 사라지겠지?
줄곧 한 자리를 맴돌며 썩어가던 그녀의 내면에서 이상기류가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묘지를 파헤치고 그녀가 묻혀있는 관 뚜껑을 열어버리는 바람에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것과 흡사했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너무나 생경한 느낌이었기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영원한 안식을 방해한 주인공이 사라져야만 내면의 동요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 뭐하고 있지?”
상드라는 파트릭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늘 뱀처럼 은밀하게 접근했다. 단지 필요할 경우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숨기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나타나 기습공격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능력도 탁월했다.
파트릭이 상드라 옆에 앉으며 다정하게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바깥 공기가 제법 찬데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아직 해가 떠 있잖아요.”
“이제 그만 들어가.”
정말 감기에 걸릴까봐 걱정돼 하는 말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명령에는 절대로 토를 달지 않는 게 철칙이었지만 상드라는 평소와 다르게 대답했다.
“좀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 pp.325-326
상드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이 자신을 단단히 옭아매고 있다는 걸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몸속까지 깊이 파고든 사슬을 파트릭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그와 연결된 사슬이 끊기는 순간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튀는 고통과 함께 생을 끝마쳐야 할지도 몰랐다.
파트릭은 세 살 때 혼자가 된 상드라를 맡아 키우기 시작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전무했다. 유월의 어느 날 밤, 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다리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고속도로 한복판에 떨어진 엄마를 대형트럭이 다시 한 번 깔아뭉개고 지나갔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전무했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 p.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