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하나둘 다른 포작선으로 옮겨 탔다. 마지막 남아 있던 어부가 준사를 지그시 바라다보았다. “내게 할 말이 있는가?” 늙은 어부는 바다에서 온갖 풍상을 겪어 온 듯 주름살이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깊이 패어 있었고 안색 역시 새카맣게 그을려 있었다. “항복을 하면 목숨을 유지할 수도 있고, 목숨이 연장되면 탈출의 기회도 생기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나리, 소생은 두 번씩이나 적의 포로가 되었으나 노를 저을 수 있는 기회 때문에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생명의 기회를 쉽게 포기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준사는 늙은 어부의 충고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죽음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에게 내린 것일까? 그것은 순전히 즉흥적인 판단이 아니었던가. 무릇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죽음을 작정했다면 적어도 자신의 모든 것들과 타협해야 한다. 뜨거운 가슴에게도 물어봐야 하고, 열정적인 정신에게도 동의를 구해야 하고, 자신의 건강한 육체와도 타협해야 한다. ---「열일곱 의리(義理)의 장」중에서
“멍청이라고 했냐? 왜?” “참는 것은 그런 게 아냐. 사랑은 결코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그건 쟁취하는 거야. 내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해 주고, 그의 마음을 내게로 뺏어 오는 거지. 사랑은 전쟁이야.” 오표는 갑자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랑, 그가 견뎌 내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럼 그것은 무언가? 일패 공주를 향한 자제하기 어려운 심적 고통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지 오표는 당황스러웠다. “오빠는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거야.” 이미 아란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 계집아이는 여진의 부족에서 그냥 세월만 보내고 있던 들판의 잡초가 아니었다. 일패 공주에 대한 오표의 감정을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어찌해야 하는 거냐? 어찌해야 옳은 것이냐?” ---「스물하나 구원(救援)의 장」중에서
“우리 모두 왔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광해군은 사지에 뛰어든 이순신과 원균, 그리고 각 수군 장수들에게 고마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으나 미처 표현할 길이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과 동시에 이 장소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자 그 모든 것은 일종의 허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감이 엄습했다. 자신에 대한 회의이며 원망이었다. ‘나로 인해 통제사를 비롯한 장수들이 희생당하게 되었다.’ 이순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하, 신은 저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라고 통제사가 절규하는 것만 같았다. 부친인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을 병적으로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행동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고맙소! 장군의 충성심을 잊지 않겠소.’ 광해군은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겹겹이 싸여진 적의 포위망이 결코 두렵지 않았다. 광해군은 마지막 돌격 명령을 내리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