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흔히 '공익(公益)'은 좋고 '사익(私益)'은 나쁘다고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장경제 체제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바람직한 '사익 추구'야말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힘이다. 사익 추구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을 돕기 위해 한 명의 철학자, 네 명의 경제학자, 두 명의 행정학자들이 모였다.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사익 추구'에 갖는 오해를 떨쳐버리길, 이 책을 엮은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과 7명의 지식인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다. -현진권(자유경제원 원장) -신중섭(강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권혁철(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정기화(전남대 경제학부 교수) -민경국(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김행범(부산대 행정학과 교수) -황수연(경성대 행정학과 교수) -김승욱(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p10 한국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서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국민들의 인식수준과 비례해서 발전하게 된다. 사익을 나쁜 것으로 보고, 억제해야 할 인간본성으로 취급하게 되면, 우리의 시장경제는 더 발전할 수 없다. 한편 사익의 연장선에는 기업의 이윤이 있다. 사익처럼 기업의 이윤 추구 행위는 정당한 것이다. 긍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조선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익과 기업 이윤을 억제하는 정책을 강제하는 것이 정의롭고 공익을 위한다고 착각한다.
p42 애덤 스미스는 공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보호무역을 지지하는 중상주의자들을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인들이 모이면 자신들의 이익에 도움이 될 규제를 고안하고 그것을 입법화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단순히 사익 추구를 허용하는 것만으로는 건강하고 풍요로운 세상이 보장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가 우려하였듯이 모든 사익 추구가 정당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유 시장에서의 사익 추구만을 제한적으로 정당화화였다.
p64 시장경제에서 사적 이익 추구는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고, 타인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자신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다. 타인의 지시나 명령에 의한 강압적인 협력이 아니라, 자기 이익 추구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연발생적이고 자발적인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것이야말로 자유시장경제의 기적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인의 자기 이익은 물론 사회와 공동체의 이익도 함께 증진된다.
p90 결국 시장의 사익 추구는 부를 증대시키지만 정치에서의 사익 추구는 부를 감소시킨다. 시장의 사익 추구는 허용될수록 물질적 풍요가 증대하지만 정치의 사익 추구는 허용될수록 사적 재산권을 제약하여 국가의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 따라서 시장에서는 사익 추구는 허하고, 정치에서의 사익 추구는 금해야 하는 것이다.
p115 이기심을 뜻하는 사익 추구는 본능적인 것이 아니다. 본능은 이타적이다. 사익 추구는 후천적으로 습득한 근대적 산물이다. 즉 문화적 진화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문화적 진화는 한편으로는 사익 추구를 허용했지만 다른 한편 그 사익 추구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길들이는 장치를 마련했다. 그게 조정과정 경쟁과정 그리고 처벌과정 등 사익 추구에 대한 시장의 자율규제 메커니즘이다.
p137 공익이 사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실체설은 앞에서 본대로 많은 문제가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정부의 공익이란 결국 “사익으로부터” 변환 및 조정되어 만들어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과정설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개인의 이익을 합산한 것을 공익으로 보거나, 혹은 개인의 이익 중 공통적인 것을 공익으로 보거나, 혹은 개인의 이익 자체가 공익이라 보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p173 개인들의 사익을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즉 소위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시장 거래에 맡기고 시장 거래의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외부성의 문제도 재산권의 설정을 통해 시장 거래를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가능한 시장에 맡기고 정부에 할당할 일은 제한되어야 한다. 시장 거래를 이용할 수 없는 경우 정부의 집합적 행동에 의존한다. 그럴 때도 정부가 할 일은 구성원들이 만장일치 합의를 볼 수 있는 일에 국한되어야 한다.
p193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도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즉 기독교가 인간이 내면에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탐욕을 경고하고, 그 대신 사랑을 베풀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인간의 합리적인 경제적 동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