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하느님이 잠적했다. 아무 말씀도 없었다. 전능하신 주님이 자리를 비우자 하늘 궁전의 빛 향기부터 서서히 엷어졌다. 늦은 오후 - 지금쯤 하늘 궁전 뒷동산을 등에 대고 반대 쪽 총리 관저에서 시작하는 시가지가 황금색에 물들고 지구촌으로 말하면, 아마존 밀림 지대에서나 맡을 법한 꽃향기와 피톤치드를 천국 주민들이 마음껏 즐겨야 할 때다. 하지만 이 순간 상황은 불안하다. --- p.18
“천국에서는 모든 일이 순조로운 것 아닙니까?” “원칙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지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준 것처럼 천국에서도 이를 허용했습니다. 인간이 기계 부속품, 로봇이 아니듯 천국 주민들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사탄이 끼어 들 틈이 생기는 모양입니다.” “맞아요. 자유의지 때문에 생긴 하느님에 대한 불신, 인간 스스로 과도한 자신감이 온갖 악행의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이웃 사랑은커녕 남을 이용해 자신의 욕구 충족을 극대화하고 독재자를 만들어 내지요.” --- p.31~32
“허블 박사, 지금도 우주는 쉴 새 없이 팽창하고 있겠지. 이름 없는 별들이 계속 생기는 한편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가거나 대폭발로 우주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별들도 수없이 많을 테고. 생성과 사멸, 광활한 우주 팽창 현상은 장엄한 서사시 같은 거야. 하느님만이 주재할 수 있는 일이지. 일부 지구 과학자들이 빅뱅 이전의 수축을 우려하는 이도 있지만 기우라고 보네. 그런 와중에 페르가몬 지옥별이 천국과 지구 쪽으로 역류해 온다면 분명 사연이 있을 거요. 참 잘 와 주었네. 우리도 지금 지구 지하 지옥 두목 아마토의 준동에 관해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루시퍼와 아마토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군.” --- p.148~149
다음은 정약종 차례다. 조선의 전통 복장인 두루마기 옷깃을 여미며 그는 스스로 한복을 잘 입고 왔다고 생각한다. “제가 살던 나라 조선,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어른들, 또는 지혜자를 만나러 갈 때 두루마기란 이런 겉옷을 입습니다. 오늘 저는 이 옷을 특별히 꺼내 입고 와서 여기 계신 어른들을 증인으로 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하겠습니다. 지금 천국과 지구가 잘 가고 있는지, 혹시 탈이 나있다면 어디서부터 고쳐야 할지 여러 선배님과 저의 마음속에 성령처럼 숨어들어 지혜를 주십사 하고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부재를 애타게 걱정하지만 기우입니다. 하느님은 이 우주에 꽉 차 계신 분, 어디에도 계시지요. 우리의 진실한 기도는 하느님이 소재 불문하고 들어주십니다. 하느님은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역사를 창조하고 곧 돌아오실 겁니다. 오직 기도하고 행동할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