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 남편의 결혼식
“뭐라고? 결혼? 당신이? 하!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다. 당신이 결혼을 해요? 나 하나 잡은 거로도 모자라든? 당신은 미쳤어!”
세연은 전화통이 부서져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쁜 자식.”
여전히 대놓고는 말하지 못해도 뒤에서는 별의별 욕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장족의 발전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세연은 자신이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었노라고 씁쓸히 생각했다. 그 망할 개 자식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양순하고 나긋나긋했던가! 뭐, 꼭 그랬던 게 좋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많이도 변했다는 말이지.
그녀는 사랑이 뭔지 아는 여자였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자부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말 썩어 문드러져도 싼 은성제, 그 엿 같은 놈만 아니었어도 그녀의 인생은 훨씬 윤택하고 우아했을는지도 모른다.
“생각할수록 열 받네. 지가 결혼을 하면 했지, 왜 전화까지 하고 지랄이야! 내가 가나 봐라.”
갖가지 욕설을 주절거리며 세연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런 식으로 끊었다고 화난 건 아니겠지? 아이 씨! 너 정말 왜 이러니! 그 자식이 화를 내건 말건 신경 쓸 게 뭐 있어!’
띠리리리-
다시 벨 소리가 들리자, 채 한 번이 다 울리기도 전에 세연은 재깍 수화기를 집어들고 황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성제 씨? ……뭘 잘했다고 또 전화야?”
한껏 거만스럽게 그를 야단치고 싶었으나, 그녀의 음성은 이미 한풀 꺾여 있었다.
“뭐라구요? ……몇 시? 그러지 말고 청첩장을 보내요! 전화로 얘기하니까 더 신경질 난다! ……아냐! 끊으란 말은 아니구…….”
‘이런, 우라질. 또 시작이다, 또! 뭐가 꿀린다고 이렇게 벌벌 겨 주냔 말이야! 그러니까 이 자식이 더 신나서 날뛰는 거 아냐?’
입가에까지 손가락이 올라가 슬금슬금 배회하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손을 내렸다. 손톱 물어뜯기가 다시 시작된다면 차라리 죽겠다. 어떻게 가다듬은 손톱들인데 그리 호락호락 망쳐놓을 수는 절대로 없다.
“좀 상냥하게 말할 수 없어요? 뭐야? 시간이 없어? 이럴 거면 왜 전화를 해요! 나중에 열불 낼까 봐? 내가? 착각도 유분수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어라, 이 망할 자식 봐라…….’
“끊었잖아. 아이 씨, 하여간 싹바가지하고는…….”
손에 들린 수화기를 통해 규칙적인 신호음만 ‘뚜뚜뚜’ 시끄럽게 들려왔다. 대체 언제 끊었다는 것인지. 말을 하고 있는데 끊어버리다니.
전남편은 함께 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또다시 집어던지듯 수화기를 올려놓고 한동안 씩씩거리며 주변을 어정거렸다. 물론 분이 풀리려면 그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씨근덕대다가 무심코 리모컨을 집어 들어 TV를 켰다. ‘동물의 왕국’이 하고 있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늘 취하곤 하는 익숙하고 가장 편안한 자세를 잡았다. 한참을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으려니 눈망울 가득 말간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닌 척 목을 ‘음음’ 하며 가다듬기도 하고 열심히 눈을 깜빡여도 보았으나 걷잡을 수 없었다. 하여간 이놈의 눈물이란 건 참거나 조절할 수 없도록 칼 같은 타이밍에 치고 나오는 것이다. 빌어먹을 것들.
그토록 부단한 노력을 쏟아 부었건만, 속절없게도 그녀의 드높은 긍지와 자의식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그녀는 다시금 자신이 은성제에게 속한 여자라는 착각에 빠지고 있었다. 아니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소유하지 못한다. 일 푼어치도! 그래야 한다. 이를 악물자.
두어 시간을 대책 없이 훌쩍이던 세연은 가까스로 기운을 차리고는 뒤뜰 허브 밭으로 나가보았다. 또 이틀이나 물 주는 걸 잊어버려서 유난히 물을 좋아하는 세이지랑 민트들이 축축 늘어져 있다. 물론 더럽게도 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툭하면 뭘 망각해 버리는 세연의 건망증이 애들 - 세연은 자신의 허브나 고양이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 을 말려 죽이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올해는 더 더운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튼실함을 자랑하는 로즈마리까지도 당할지 모른다. 아무래도 산수기(땅 속에 묻어 제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물을 주게 만든 장치)를 설치해야 할까 보다.
“이렇게 손바닥만 한 밭 하나 못 챙겨서 산수기 타령이니? 그냥 다 포기해. 애초부터 넌 뭘 제대로 키울 만한 자질이 없는 거라고!”
신경질적으로 한마디 내뱉던 세연은 그래도 그해 봄에는 키운 지 일 년 만에 세이지가 진홍색 꽃을 피웠고, 해마다 라벤더와 민트는 연보랏빛 꽃을 피웠던 것을 기억해 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조리개에 물을 담아 스테비아에 뿌리는 순간, 하얗고 조그마한 날벌레들이 우수수 날아올랐고, 그녀의 가장된 평정은 여지없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처음엔 먼지라고 생각했으나 거의 보일락 말락 한 작은 날개가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얼핏 눈에 띄었다.
“꺄아악!”
찢어져라 비명을 지른 세연은 당장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가 저온동물만 죽인다는 살충제를 가지고 나와 스테비아를 향해 마구마구 뿌려댔다.
“으아아아아악! 이 망할 자식들아! 다 죽어! 죽어! 감히 내 허브를 먹다니!”
올해도 스테비아 먹기는 틀린 모양이다. 아무리 사람에게 해가 없는 살충제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찝찝하지 않은가? 명색이 벌레 죽이는 농약이라는데. 설탕 당도의 100배에 해당하는 스테비아의 당분은 살이 찌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당뇨를 앓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다이어트를 원하는 여성들이 말려 두었다가 설탕 대용으로 쓰면 좋다는데, 세연은 벌써 3년째 스테비아를 키우고 있었지만 한 번도 수확을 성공해 본 일이 없었다. 원래 저런 날벌레들이나 진딧물은 날이 가물면 끼어드는 것들로 툭하면 물을 안 주곤 하니 얼마나 신들이 났겠는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열이 확 받쳐 올라왔다.
“젠장맞을, 옛 서방 놈이 재혼을 한다질 않나, 며칠 물 안 줬다고 벌레 새끼들이 기승을 부리질 않나. 아이 씨, 사는 게 뭐 이래. 그럼 어떡하냐고! 뇌세포 수가 딸려서 그런 건데. 이씨, 이씨, 다 뒤집어엎어 버릴까 보다!”
텅 비어버린 살충제 통을 냅다 집어던지고는 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일명 코리안 쇼트헤어, 귀염둥이 ‘나나’가 와서 옆구리에 제 머리통을 부비부비 할 때까지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떡 벌어지게 추태를 부렸다.
“나나…… 엄마는 진짜 아직 멀었다. 그치?”
나나 덕에 정신을 차린 세연은 녀석을 품에 안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허브 밭에 물 주는 건 또 잊어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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