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음력 윤삼월 12일(호적상으로는 양력 8월 10일) 경남 김해군 진영읍 사산리 132번지에서 부 김상준(金尙俊), 모 최복남(崔福南)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 말인 1943년 진영 대창국민학교에 입학하여 해방될 때까지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 접한 일본어 교과서가 문학적 원체험을 이루고 있다. 6·25전쟁 직후인 1955년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범대 국어과에 입학한다. 교장 선생이 되라는 부친의 실용적인 권유와 문학(창작)을 공부하겠다는 의지는 대학이란 학문(과학) 하는 곳이라는 이념에 의해 좌절당한다. 학보병으로 군대를 마치고 돌아와 도서관에서 신비평 읽기에 몰입한다.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마치며 쓴 석사 논문 <The Structural Properties of Poetry>(1962, 지도교수 이희승)는 그 산물이었다. 대학 졸업 이후 인천교육대학에 근무하게 된다. 석사 학위를 받은 직후부터 도서관을 전전하며 카프 연구를 비롯하여 근대비평사의 틀을 마련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한편 ≪현대문학≫(1962. 8)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하여 비평 활동을 시작한다. 1968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전임강사로 임용되고 1975년에는 인문대 국어국문학과로 전임한 이래 2001년까지 33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한국 근대문학의 이해’라는 교양 과목은 서울대 최고 인기 강좌 가운데 하나였다. 1970년 하버드 옌칭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 도쿄대학에 유학한다. 또 한 번의 일본 유학은 1980년으로서 이번에는 일본국제교류기금이 후원했고, 주된 목적은 이광수와 관련된 자료 조사였다. 1974년 ‘유신 헌법 개헌을 위한 문학인 61인 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보안사에서 도쿄 유학과 관련하여 조사를 받는다. 1976년 ≪한국 근대 문예비평사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신제 1호)를 취득한다. 이후 문학사, 문학 사상사, 작가론, 예술론, 비평 등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한국 현대문학사의 기틀을 닦았으며 또한 비평 활동을 통해 당대의 문학 현장에도 참여했다. 2001년 정년퇴임과 더불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되었다.
편자 : 윤대석
1970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학사), 서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석·박사)를 졸업하고 도쿄 외국어대 외국인 연구원,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부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국어교육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1940년대 한국문학(‘친일문학’)의 탈식민적 가능성을 탐색한 박사 논문 전후의 작업에 이어, 경성제대를 둘러싼 한국 사회의 ‘교양주의’를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교양’에 대한 역사적 탐구와 더불어 ‘미래의 교양’으로서의 문학 교육이라는 실천적인 작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식민지 국민문학론≫, ≪식민지 문학을 읽다≫ 등이, 번역서로 ≪국민이라는 괴물≫, ≪키메라?만주국의 초상≫ 등이 있다.
최고의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그것은 예술일 수 없으며, 철난 뒤에 익힌 일본어로서는 예술적 경지에 이르기가 거의 불가능한 이 이중 구속에 그는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이러한 절망의 질이랄까 밀도가 낳은 산물이 그의 창작들이다. 그 절망의 질이랄까 밀도의 어떠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향수> 속에 나오는 ‘북해공원의 에피소드’이다. 고립무원에 놓여 독립운동가인 남편의 타락과 배신으로 아편 밀매로 연명하는 누나란 무엇이뇨. 그 자체가 어머니이자 고향이 아닐 수 없다. 북해공원 벤치에 모처럼 앉은 오뉘란 그 자체가 ‘모국어의 실체’가 아닐 수 없다. 그 틈으로 끼어든 것이 중학과 대학의 동창인 일본인 이토 소위였다. 이토 소위란 그러니까 그 자체로 ‘일본어’가 아닐 수 없다. 이 틈에 놓인 ‘나’란 무엇인가 이토를 뜻밖에 만나자 ‘나’는 일본어의 실체로 동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의 무의식 속에 일본어의 실체가 은밀히 작동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한순간 일어날 수 없다. 이 무의식의 작동의 힘의 위세는 그의 ‘의식’을 넘어서고도 남는 것이었다. 누나를 향해 저도 모르게 일본어로 외치는 상황이 벌어질 만큼 절대적이었음이 판명된다. 의식의 레벨(조선어의 실체)을 무의식의 레벨이 무화(無化)시키는 이 장면이란 새삼 무엇인가. 조선어를 두고 ‘일본어가 되라!’라고 평소에 염원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태가 벌어질 이치가 없다.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되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