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감마님. 이제 나서야 하실 때가 아닙니까.”
“무슨 소리냐.”
“이대로 가다간 민란이 일어나 나라가 망하든, 왜가 밀고 들어와 망하든 어떤 식으로든 망하게 될 겁니다. 임금이란 작자는 주색에 탐닉해 허파가 썩어 들어가고 간신 아첨배들은 왕성 묘당을 에워싸고 희희낙락하고 있으며, 척신들은 나라가 팔리든, 박살나든 저들의 천년 권세 추구에만 몰두하고 있고, 관리들은 산적의 탈을 쓰고 백성들이 등골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때 대감이 나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느 때가 그때란 말입니까.” ---p.20
나는 저들 김씨의 개들에게 개만도 못한 투전꾼에 시정잡배였기 때문이다. 왕족이지만 왕족이 아닌. 그러나 명복은 내가 아니다. ‘나’란 존재의 가면 속에 숨어 은폐된 행운을 누리는 명복은 나의 입이다. 내가 말할 때, 나는 내 입을 다물어 버릴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주정뱅이의 입은 도려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할 것이다. 명복을 통해서. 왕궁의 말을 유장하게 내뱉는 명복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p.58
거대한 크기의 상을 가득 메운 산해진미가 오직 권좌의 중심에 오른 ‘나’란 존재 하나만을 위해 진설되었다는 상황 자체가 역겨웠다. 길바닥에 죽어 내버려진 역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약재 하나 변변히 구하지 못해 죽어 나가는 시간에 나는 머리 없는 짐승이 되어 산해진미를 잘도 받아 처먹고 있다. 이 더러운 모순의 한복판에서 이 상을 둘러엎지도 못하고 있다. 권력에 도취된 우상이 되고 싶은 건가. 내 마음속 장기(臟器)는 결코 그러한 체념의 체질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해서 밀어낸 것이다. 저들의 접대를 피할 수 없었지만 내 몸은 저들과 나의 비겁함을 거부하고 있다. 해서 나는 그대로 김좌근과 그의 뻔뻔스런 자식 놈이 보는 앞에서 먹은 것을 죄다 토악질해 버렸다. 우아한 산해진미가 내가 게워낸 찌꺼기들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후련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조대비와 같은 마음이 되어 김병기의 사지를 찢어 놓았을 것이다. 파락호 시절의 나를 능멸하고 왕족의 등골을 파먹은 원흉의 두 팔, 두 다리를 말이다. ---p.114
“내가 뭐라고 했던가요?”
“조선을 탐하는 외이들이 너무나 많다구요. 왜국을 위시해 영길리(‘잉글랜드’의 음역어), 법국(예전 ‘프랑스’를 이르던 말), 아라사(‘러시아’의 음역어), 서양 놈들의 마수가 우글거린다고 하셨습니다. 양이(洋夷)는 서학으로 우리네 문화를 좀먹고 왜국은 수교(修交)라는 허울뿐인 명분으로 이 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힌다고 하셨지요.”
“허허.”
“또한 선생은 내가 만약 집권하게 되거든 파쟁을 없이 하고 유생들의 썩어빠진 머릿속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고 관기를 엄히 다스리고 나태와 무력에 빠진 백성들에게 근면의 정신을 소생시키고 깊은 혜안을 품어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건져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여전히 제겐 유효하게, 아니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더군요.”---p.118
“[삼봉집]이 아닙니까.”
“그중 '조선경국전'입니다.”
명복이 침묵했다. 나는 그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한 번 더 말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란 게 존재한다.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처음 한양 천도를 시작했을 때 무학대사는 경복궁의 위치가 궁궐로서 적당하지 않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정도전은 건국의 이념, 조선 역사의 문을 영구히 열어 놓는 데 있어 경복궁 터만큼 적합한 길지는 없다고 예언했죠. 그 역사의 중심에 경복궁이 있고 근정전이 존재하며 조선의 현재와 미래가 존재합니다.”
명복이 고개를 숙였다. 정도전을 언급하는 아비의 심정, 이 애끊는 호소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p.156
그러나 개혁의 과정에 너무나 많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동학인들의 피, 서학을 따르던 무리들의 피, 경복궁을 짓기 위한 공역 속에서 죽어간 백성들의 피. 그 피가 내 입 속에서 역류하거나 파고들고 있다. 어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할 수가 없다. 포악한 정욕의 별세계 속에 파묻힐 뿐이다. 추선을 이렇게 취급해선 안 된다. 이렇게 취급해선.
너는 답을 알고 있다.”
“대감.”
“부처에게 빌어라. 빌고 애원해라. 부처가 네 년을 원한다면 아낌없이 두 다리를 벌려 주어라.”
“…….”
“제발 이 빌어먹을 육신. 저주의 나락으로 빠져도 좋으니 말이다.”
“그만하세요.”
추선이 내 머리를 힘껏 끌어안는다. 그녀의 젖가슴이 내 정수리를 짓누른다. ---p.197
계유년(1873년) 시월 중순. 죽동 민승호 집에 있던 은밀한 밀담의 참석자들 중엔 민승호와 민규호, 민겸호, 심지어 나의 수족이라 믿었던 조성하와 조영하 형제, 이유원(조선 후기의 문신. 1873년 대원군이 실각쿇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영의정이 됨)까지 가담되었다고 했다. 그들이 나눈 밀담의 주제는 최익현의 상소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러한 밀의의 마지막 배후는 애써 궁리하지 않아도 너무나 선명해 두려울 지경이다. 중전, 그녀의 심모(深謀)가 끌어들인 추잡한 계략인 것이다.
그 순간, 나의 아들 명복을 무자비한 치마폭으로 끌어들이고 무친의 특성을 제멋대로 악용한 채, 금수만도 못한 파탄의 논리를 들어 획책하고 유혹하는 이 순간들을 겪어내는 동안, 나는 결코 그 계집을 중전이라 부를 수 없었다. ---p.206
“승하하지 않았다면 폐비시켰어야 했던 사람이오.”
“지금 폐비라고 하셨습니까.”
“물론이오.”
명복의 말문이 닫혀 버린다. 나의 결의는 멈추지 않는다. 중전의 죽음은 비틀린 이 땅의 지형을 바로잡는 결정적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중전의 가장 큰 실덕이 뭐라고 생각하시오.”
명복의 답을 기다린 것이 아니다. 이건 나만의 결의다.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조선의 왕으로 존재하는 나의 아들에게 결재를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결의. 그런 것이다.
“조선에서 일본의 암운을 걷어내야 하오. 중전이 너무 일을 크게 벌였소.”
“무슨 일 말입니까.”
“수교란 것을 했지 않았소.”
“그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입니까.”
“한 가지만 묻겠소.”
“…….”
“그것이 수교요? 오랑캐들과 무슨 수교를 한단 말이며, 그 억지와 부당함으로 뒤엉킨 불평등조약이 무슨 수교란 말이오?” ---p.261
누가 나를 비난할 것인가. 나는 국태공이다. 왕의 아버지다. 한때 권력의 노예였으며, 권력의 파괴자였으며, 새로운 권력의 창조자였다.
또한 나는 인간이다. 남자다. 외로움에 목놓아 울 수 있는, 울어야만 하는 사내다. ---p.288
눈을 감았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의 중첩, 그 무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다.
그냥 이대로 눈을 감고,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시간을 견뎌낸다면, 과연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조선의 희망이 보일까. 이 땅의 민초들이 쏟아낸 탄식과 신음을 어루만져 줄 성군이 탄생할까. 외세의 범람에 의해 항시 좌초의 불안 속을 표류하는 섬약한 조선의 배가 어느 따사로운 태반 속에 깊이 들어가 정박할 수 있을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