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번 핑계를 댔다. 정말 배가 고팠던 데다, 다른 핑계는 이번 주만 해도 두 번씩 돌려썼기 때문이다. 잦아지는 키스 타임을 끝내려면 더 많은 핑곗거리가 필요했지만, 어쩐 일인지 핑계를 대는 빈도는 매주 줄어들고 있었다. 제러미의 방은 우리 공부방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부모님이 내방에 남자 친구를 들이는 걸 용납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 목적이 공부라고 해도, 그저 방에 진열된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 피규어를 자랑하고 싶을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긴 부모님이 그런 규칙을 세운 건 현명한 처사였다. 어느새 ‘제러미의 방에서 공부하기’는 키스 타임으로 통했고, ‘무언가’를 하자는 말은 거의 키스를 뜻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스킨십에만 집착하는 애들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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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하자면, 남자 친구의 문자 메시지를 훔쳐보거나 졸업 앨범 속 낙서의 숨겨진 의미를 알아내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스토커 같은 여자애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지금은 진실이 숨겨져 있기는커녕 눈앞에 버젓이 드러난 상태였다. 제러미가 자유투 라인에서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은 이상, 나에게 거짓말한 게 틀림없었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제러미에게 묻기도 전에 나는 그 이유를 알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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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갖다 줄 듯 물어보는 제러미의 모습이 가상의 러시모어 산으로 등반을 떠나는 제러미의 아바타보다 더 거짓처럼 느껴졌다. 제러미는 나한테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 한물간 마트에서 제임스 테일러의 노래가 들려올 때 제러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저 곁에 있는 따뜻한 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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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감을 다시 휘리릭 넘기자, 할머니의 11학년 시절이 담긴 사진이 나타났다. 단체 사진 속 여학생들은 모두 진주가 달린 검은 드레스 차림이었다. 흑백 사진이어서 할머니의 주근깨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위로 붕 띄운 머리 스타일은 폭탄 맞은 머리처럼 보기 싫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60년대 스타일은 꽤 멋져 보이던데, 위로 붕 띄운 머리 스타일은 곱슬머리인 할머니한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머리가 왜 이래요? 언니, 이건 절대 따라 하지 마.”
“이렇게 머리를 붕 띄워 넘겨 묶는 게 그 시절 유행이었단다. 어머니가 하도 성화를 부리셔서 어쩔 수 없이 따랐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야 벗어날 수 있었어.”
--- p.101-102
올리버가 왜 이러지? 내 편을 들다니. 다른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깜짝 놀랐다. 올리버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괴짜 인간이었다. 한 번은 사십이 일 내내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온 적도 있었다. 왜 그렇게 오렌지색 학교 티셔츠만 입고 다니는지, 당시 교내에서는 이런저런 추측들이 난무했었다. 실업에 반대하기 때문이라느니, 지나친 상업화에 대한 저항이라느니, 환경 운동의 일환이라느니 여러 소리가 많았지만 나는 올리버가 그냥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어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올리버 킴벌이야. 누군가 매일 똑같은 티셔츠를 입으면 더럽다고 하겠지만, 내가 입으면 어떤 의견을 주장하고 싶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 p.138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는데?”
그러는 나라고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해 아는 게 뭐 있나? 관련된 책을 몇 권 읽어 보려고는 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해 생각하면 언제나 겨드랑이 털이나 브래지어 화형식, 성난 여자들, 정치적 외침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예쁜 파티 드레스나 학교 클럽만큼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도대체 여자들이 가족을 보살피고 청소를 좀 한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잘못된 건데? 우리 할머니도 성공하셨잖아?”
“할머니가 성공한 이유는 열심히 일하셨기 때문이야. 나도 60년대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어. 그 시절에는 여성을 위한 스포츠나 직업도 없었고, 같은 일을 하면서 남자보다 돈도 적게 받았다고.”
--- p.216
지니에게 당장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만찬회와 홈커밍 파티가 다 끝난 일요일에 비밀을 풀어 놓아도 괜찮겠지. 안 그래도 첫 파트너 일로 걱정이 많은데, 캔디스 고모의 존재나 엄마의 블로그에 대한 이야기로 걱정거리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다시 디지털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 두는 게 낫다. 이본느 말대로, 문자 메시지로 알리는 게 훨씬 덜 어색할 테니까.
--- p.364
물론 제러미가 바람을 피운 건 내 탓이 아니다. 제러미가 진정한 내 모습을 보지 못한 것도 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우리 관계가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첫사랑인 제러미에게 충실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나는 제러미를, 제러미는 나를 더 잘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이다.
--- p.395
“맬러리, 동결 상태를 원한다고 했지? 그러면 난 빙하가 될게. 느린 걸 원한다고? 거북이 되지, 뭐. 하지만 매일 밤 휴대 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널 기다리는 일도 멈추진 않을 거야. 얼마나 오래 걸리든 네가 준비될 때까지 말이야. 스카우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해.”
올리버는 손을 내리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언제쯤이면 나 스스로 단단해질지, 올리버를 만날 준비가 될지 나조차도 모른다. 무얼 준비한다고 딱 부러지게 정할 순 없지만, 앞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고민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더군다나 올리버 킴벌이 관련된 문제라면 말이다.
--- p.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