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범죄 사건에는 피해자가 있다. 법원의 형량이나 제3자의 객관적 기준에는 범죄의 경중이 있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모든 범죄 가해 행위가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래서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범죄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상으로 충격의 정도와 회복 상태, 심경 등을 조사해 정리한 ‘범죄 피해 충격 보고서(Victim Impact Statement)’를 채택해 양형의 참고로 삼는다. 하지만 피해자마다 범죄 피해의 충격을 받아들이고 이겨 내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범죄 피해 충격 보고서’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범죄자에 대한 형량의 정도는 객관적 기준에 따르되 재판, 기소, 수사 등 형사 절차 전반에 걸쳐 피해자의 참여를 보장하고 그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가 입은 피해의 회복에도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쏟고 있는 것이다.--- p.4
미국의 정신의학자 레너드 쉔골드(Leonard Shengold)는 성폭력을 포함한 아동학대를 일컬어 ‘영혼 살인’이라 했다. 실제로 살인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영혼을 죽임으로써 살인한 것과 다름없는 피해를 남긴다는 의미이다. ‘아이들은 무조건 어른 말을 잘 들어야 한다.’라는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하던 1970년대, 아홉 살 때 이웃집 아저씨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당한 김부남은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고도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편이 다가올 때마다 반사적으로 몸서리를 치며 거부해 두 차례 이혼을 당하면서 그녀의 몸과 마음은 처참하게 무너져 버렸다. 결국 그녀는 성폭행 피해를 당한 지 21년이 지난 1991년 1월 30일, 중풍으로 쓰러져 있던 가해자 송백권을 찾아가 한 맺힌 응징의 일격을 가해 살해했다.--- p.14
묻지마 범죄가 발생하는 원인은 세 가지 요소의 결합, 즉 ‘인격 장애’, ‘사회적 스트레스’, ‘촉발 요인’에 있다. 묻지마 범죄가 폭탄이라면, 성장 과정의 문제 등으로 인해 분노와 공격성, 욕구 불만, 대인관계 문제 등의 성격적 결함을 형성하게 된 사람들은 ‘화약’이 잔뜩 장전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닥치는 실직, 취직 실패, 채무, 생계 곤란 등의 경제적 문제와 이혼, 불화 등과 같은 가정 문제 등은 ‘뇌관’ 역할을 한다. 이렇게 화약이 장전되고 뇌관이 꽂힌 사람들에게 불을 당기는 ‘점화’ 역할을 하는 사건을 ‘촉발 요인’이라 한다.--- p.43
우리가 끔찍한 묻지마 범죄 소식에 충격을 받고 나와 내 가족에게 유사한 위험이 닥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이미 범죄자들의 잔혹한 공격에 희생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헤어 나오기 힘든 고통과 절망 속으로 더욱더 깊이 빠져들고 있다. 묻지마 범죄는 국가와 사회의 기능에 고장이 나 발생하는 것으로, 가해자는 물론 국가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들과 달리 범죄 피해자에 대한 보상 체계와 치료, 상담 등 지원 체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이웃과 시민들도 어쩌면 나 혹은 우리 가족 대신 피해를 입었을 피해자들에 대해 감상적 동정 외의 관심과 손길을 내밀지 않고 있다. 우리 모두가 더 깊은 관심과 신중한 태도로 가족, 동료, 친구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피해자 지원 방안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 p.76
유괴 범죄는 어린이, 지적 장애인 등을 부모 등 보호자에게서 격리시킨 뒤 인질로 잡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범죄를 일컫는다. 이러한 범죄는 대부분 돈, 복수, 노동력, 성, 양육, 살인 등의 이유로 벌어진다. 가장 많이 알려진 유괴 형태는 어린이를 유인하거나 납치한 뒤 부모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본능인 모성과 부성을 악용해 이익을 취하려 하기 때문에 유괴 범죄는 ‘가장 파렴치한 범죄’라 불린다.--- p.80
매주 수요일이면 시청 쓰레기 수거 차량이 과천 일대를 돌며 밤새 가정에서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수거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시민들의 산책 장소인 중앙공원 쓰레기 수거장에서 쓰레기봉투를 수거 차량에 싣던 미화원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쓰레기봉투를 열어 본 미화원은 혼비백산했다. 그 안에는 잘린 사람의 발목이 담겨 있었다. 신고를 받은 과천경찰서 별양파출소에 비상이 걸렸다. 수도권에서 가장 평온한 경찰서 중 한 곳으로 뽑혔던 과천경찰서에 갑자기 ‘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신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파출소장은 본서 강력반에 전화를 걸었고, 현장에 출동한 형사들의 확인을 거쳐 지방경찰청과 경찰청에 보고되었다.--- p.109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에 위치한 김성출의 집은 여러 개의 쪽방이 있는 허름한 판잣집이었다. 그곳에는 인근 미군 부대 주변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다들 어려운 삶을 꾸려 나가는 처지인지라 서로 돕고 의지하며 조용히,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1992년 10월 28일 오후 4시 반, 집주인 김성출이 만 하루가 넘도록 밖으로 나오지 않는 ‘문간방 아가씨’의 방문을 연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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