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이 지혜의 완성에 관여한 순간, 하나의 부처가 된다. 여러분은 이슬방울이 대해에서 소멸될 때, 더 이상 분리될 수가 없을 때, ‘전체’와의 싸움을 그만둘 때, 자신을 비우고, ‘전체’와 하나가 되고 그 이상 대립하지 않게 될 때 부처가 된다.
만일 여러분이 기쁜 마음으로 좌절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자신의 ‘비움’이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다. 하나의 승리다. 여러분은 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대립을 통해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신은 여러분과의 싸움에서 이기려 하지 않는다. 여러분의 패배는 자기 발생적인 것이다. 여러분이 지는 것은, 여러분이 싸웠기 때문이다. 지고 싶으면 싸우라. 이기고 싶으면 비우라. 이것은 패러독스다. 꺾일 용기가 있는 자가 승리한다. 진 자만이 이 경기의 승자일 수 있다.
인간은, 그 실존의 내부에 있는 이 절대적인 ‘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무’가 그의 일면으로 확대되어서야 비로소, 구름 한 점 없는 순수한 하늘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한 인간으로 불릴 수 있다. 이 ‘무’야말로 불타가 ‘무’라고 부르던 바로 그것이다.
불타는 말한다. ‘무’가 지성을 기능하게 한다고. ‘부다buddha'라는 말은 ’부디buddhi'에서 왔다. ‘지성’이라는 뜻이다. 여러분이 ‘무’에 두었을 때, 어떤 것도 여러분을 가두지 않을 때, 어떤 것도 여러분을 한정시키지 않을 때, 어떤 것도 여러분을 싸안지 않을 때, 개방되어 있을 때, 거기에 지성이 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무’일 때 공포가 사라지므로. 그리고 공포가 사라질 때 여러분은 지성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므로.
이제야 나는 여러분에 말할 수 있다. 나는 “지혜의 완성에 의지하여”라는 말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딱 한 가지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명상이다.
사람이 딱 한 가지 이루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이 각성이다.
사람이 딱 한 가지 딛고 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내적인 근원, 내적인 실존이다.
다른 것은 모두 버려야 한다.
‘무’야말로 최대의 만트라다.
여러분이 ‘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때에는 다른 아무것도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거야말로《반야바라밀다심경》의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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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문화권에서 쓰이는 인사말 ‘나마스떼’는 ‘당신에게 깃들어 있는 신께 문안 드립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만히 음미하다 보면 등짝이 서늘해진다. 인도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고대 힌두교의 한 발전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 역시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섬긴다. 인도 출신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의 책《반야심경》의 첫 글월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 안에 깃들어 있는 부처께 문안 드립니다.”
라즈니쉬의 생각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부처가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우리 안에는 부처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부를 지음으로써 깨닫는다는 것은 그 부처의 잠을 깨우는 일이라는 것이다.
_ 옮긴이 이윤기
역자는,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다른 종교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교의(敎義)를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는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신화나 종교를 보는 눈이 병적인 교조주의, 경직된 흑백 논리에 길이 든 이 ‘진리의 편가르기’ 바람에 동의하지 않는다. 역자는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이 이를 여러 이름으로 언표(言表)한다’는 베다 경(經)의 말을 좇는다. 말하자면, 이념의 종교 정신을 주체롭게 곧추 세우자면 다른 진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이 역자로 하여금 이 책을 옮기게 했다. _ 역자 후기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