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사와 인류 정신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13~14세기 사상가요, 신비가요, 사제요, 수도원장이요, 설교가요, 행정가요, 시인이요, 여성주의자였다. 하지만 당시 가톨릭교회는 이 걸출한 하나님의 사람과 불화하였고 마침내 이단의 딱지를 붙이고 만다. 도미니크회 소속이었던 에크하르트의 영성의 깊이와 무게를 당시 기독교회가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콜로뉴 대학의 대주교였던 하인리히 폰 비르네베르크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사들에게 이단 심사를 맡겼고, 그들은 에크하르트의 오류 목록을 작성했다. 이에 대해 에크하르트는 《변론》에서 이렇게 답했다. “제가 오류를 범할 수는 있으나, 저는 이교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정신과 관계된 것이고, 후자는 의지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론과 함께 에크하르트는 교황청에 항소하지만 1327년 2월 22일 로마로부터 항소 기각 통보를 받는다. 1329년 3월 27일에 내려진 요한 23세의 칙서(In Agro Dominico “주님의 땅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적고 있다.
20세기 에크하르트 부흥을 일으킨 매튜 폭스는 수도사나 영성가들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 선 사상가들과 힌두학자들, 시인들과 예술가들을 매혹시킨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 에크하르트의 영적ㆍ지성적ㆍ문화적 영향력에 대한 수사적 물음이겠다. 그렇다. 인간과 삶의 진실, 그리고 종교의 궁극을 추구하는 맑고 정직한 영혼들에게 에크하르트는 언제나 매혹적인 사람이다. 그에게 헌정된 모든 찬사들을 떠나 그는 그저 ‘진리의 길벗’인 까닭이다.
한국교회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치유와 교회의 치유, 더 나아가 세상의 치유를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다. 율법신앙과 교리신앙,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의 포로가 된 한국교회는 진정한 기독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숨빛신앙〉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숨’과 ‘빛’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뜻하는 성서적 은유이며, 예수께서 모든 시대의 기독자들에게 요청하신 복음적 가치이다. 그런데 ‘사랑(숨빛)’이라는 복음적 가치는 기독자의 존재와 삶이 ‘예수화’될 때 열매 맺을 수 있기에 그는 새로운 복음화 곧 〈재복음화〉를 요청한다. 기존의 복음화가 예수의 길보다는 욕망(축복·성공·부흥·성장)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하므로 그가 욕망성취를 목표로 하는 기도보다 예수를 닮는 것을 목표로 하는 관상기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가 바뀌니 모든 게 바뀌더라!’ 그의 말이다. 한국교회의 부활을 바라는 그가 〈관상목회〉를 선언한 이유이기도 하다. 감리교 신학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도봉구 창동에서 은명교회를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