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시작하지 않은 상태, 한 글자도 쓰지 않은 상태를 충분히, 마음껏, 실컷, 즐기라
아, 내가 무엇을 쓰려고 했더라? 뭐부터 써야 하지? 뭘 준비해야 하지?라고 불안해하고 계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그런 당신은 작가로서 전도유망한 분. 만일 당신이 아무 불안도 없이 쓱쓱 첫 문장을 써냈다면, 그게 오히려 걱정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아무도 걸어간 적 없는 길을 간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시작하기 전에 잠깐, 나는 당신이, 몹시, 부럽습니다. 왜냐면 당신은 아직 소설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는 소설이라는 미지의 세계가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네, 그 멋진 세계를 이제부터 천천히 걸어갈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이 몹시 부럽습니다.
▶ 첫 행은 꾹꾹 참아 최대한 늦게 시작하라,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전혀 관계없는 것을 생각하라
정말 난처한 이야기지요? 아무튼 우리는, “무언가를 해라.” 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들어왔을 테니까요. 하지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한다’고 할 때의 그 ‘무언가를 한다’ 와는 미묘하게, 그러나 명백하게 다른 행위입니다.……생각해주십시오. 써보겠다는 마음으로 책상을 마주하고 앉았지만, 미처 하지 못한 무슨 일인가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뭔가 마음에 걸렸던 일도 있겠지요? 아참, 그러고 보니 어제 치과에 예약을 해두었던가? 아차, 잠깐, 오늘, 로또 복권 발표하는 날이었어! 당첨이 되면, 아아, 당첨이 되면 우선 빚부터 갚고, 그리고, 그리고……아무튼 뭔가 해야지…….
▶ 쓰기 위해서는 ‘바보’가 되라, 그리고 이야기를 붙잡아라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는 데다 아직 쓰지 말라고 하시고, 아까부터 그냥 멍하니 칠판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이것 참, 뭔가 바보 같아요.” 아뇨, 바보 같은 게 아닙니다. “예? 그 말씀은?” 바보 그 자체예요. “윽, 너무해!” 그게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그야말로 제대로 된 길로 들어선 참이에요. 당신은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만세! 나는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당신에게는 소설 쓰는 데는 아무 쓸모도 없는 지식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지식을 전부, 일단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감수성을 날카롭게 벼리고, 이렇게 암흑 속에서 눈을 크게 뜨고,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쉿, 조용히. 그렇게 떠들어서야 당신의 이야기가 그냥 지나쳐 가버리지 않겠습니까.
▶ 이야기와 놀아주라, 그리고 아이처럼 흉내 내라
자, 일단 소설을 마주하기 시작했습니까. 그러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우선, 소설과 놀아주십시오. 소설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고, “너를 꼭 안아줄게!”라는 둥의 말은 하지도 말고, 그냥 함께 놀아주면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소설은 불신이나 불안이나 의심을 버리고 당신의 품을 향해 자기 쪽에서 뛰어 들어올 테니까요. 그리고 실컷 놀았다면 이제 아이처럼 흉내 내보세요. 우선 맨 처음에 꼭 빼닮도록 흉내 내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불안하시다고요? 독창성과 개성을 중시하라고 배웠다고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독창이고 무엇이 개성인지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두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흉내 내보는 것, 흉내 냄으로써 그 세계를 깊이 아는 것, 그렇게 해서 수많은 언어의 세계를 아는 것, 나아가 그것을 통해 그 이외의 언어 세계의 가능성을 실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라. 다만, 아주 조금 즐거운 거짓말을 넣어서.
날씨가 좋아서 잠깐 산책을 다녀오겠습니다. 그 동안에 당신의 소설을 써주십시오. 첫 행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런 것은 어떨까요. 아 지난번에 나왔던 것이라고요? 뭐, 괜찮지 않습니까.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누구든 긴장해서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요. 그럴 때는 첫 부분만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리고, 그리고 다 쓰고 난 뒤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빌려왔던 첫 부분을 고쳐서 다시 돌려주면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빨리 읽어보고 싶군요, 여러분의 이야기.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