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는 현재 이미 알고 있는 것의 현상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많을 뿐, 지식의 경계와 범위를 넓히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실제로 학문의 전당들이 새로운 종교재판소가 되었다고 밝혀주는 증거는 많이 있다. 그들은 반대파를 화형대 위에서 불태워 죽이지는 않지만, 과학적 정설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거나 경력을 파괴해버린다. 잃어버린 문명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거나 기존의 과학적 패러다임을 뒤집는 증거를 우연히 발견한 사람들은 무조건 ‘이단’으로 매도된다. 이런 일들은 우연히 그런 폭로 작업에 끼어든 선량한 사람들을 다치게 한다.
― 1장 새로운 종교재판소(16쪽)
그 발견 소식이 고고학계에 전해지자, 너무나도 당연하게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의사 모를레의 보고서를 무시해버렸다. 무슨 내용이 들었든 간에, 그건 아마추어(의사)와 농민 소년(심지어 글도 제대로 못 쓰는 소년)이 작성한 게 아닌가. 그들이 보기에 그 논문의 결론에서는 아마추어 티가 풀풀 났는데, 그 이유는 기존의 잘 정립되고 옹호받는 학설에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에 문자가 있었다고? 구석기 문명과 신석기 문명의 교차점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리하여 학문의 전당들은 모를레의 결론이 한마디로 헛소리라며 공격하고 나섰다.
― 1장 새로운 종교재판소(20쪽)
보스니아는 앞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될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이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 지역은 고고학자들이 다소 건조하게 ‘고대 유럽’이라고 명명한, 가장 오래된 유럽 문명의 정착지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문화를 가리켜 빙카 문화(Vinca culture)라고도 하는데, 이 오래된 문명의 증거를 밝혀낸 유명한 고고학 지역의 이름을 따서 이렇게 명명되었다. ‘고대 유럽’은, 1980년대에 고고학자 마리아 짐부타스가 발칸 반도에 있었던 인도유럽 신석기 문화 이전의 동질적(同質的) 문화를 가리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말이다. 짐부타스의 연구 작업은 고고학계에 받아들여졌지만, 학계는 그녀의 발견 사항을 교과서에 별로 반영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 고대 유럽 문명 지역에서 발견된 조각상들은 수메르의 우바이드시대의 조각상들과 아주 비슷하다. 이것은 고대 유럽 문명이 고대 수메르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학계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 1장 새로운 종교재판소(42~43쪽)
크레모와 톰슨은 통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적 기록에서 제거된 수십 개의 증거 사례를 제시한다. 그렇게 해서 그 증거들은 금지된 고고학이 되었다. 그 증거들의 결론은 이러하다. “화석 뼈와 유물들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증거물을 살펴볼 때, 신체적으로 현대인과 똑같은 사람이 다른 영장류와 수천만 년 이상을 함께 살아왔다는 주장과 부합한다.”
크레모와 톰슨의 책이 나왔을 때, 당연한 일이지만 고고학계는 그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제시한 증거들을 공격할 길이 없자 학계는 그들을 인신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 커버의 색깔마저 시빗거리로 삼았다! 키프리언 브루드뱅크는 잡지 《앤티퀴티》의 서평란에서 이렇게 썼다. “현대인이 그리 현대적이지 않고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잡다하고 기괴한 얘기들을 분홍색 표지에다 열거하고 있다.”
― 1장 새로운 종교재판소(62쪽)
오기기아 섬이 지중해에 위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거기서 자라는 식물들도 지중해의 기후와 부합하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는, 안개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고 심지어 눈도 언급된다. 또 태양이 지평선 근처에서 머뭇거릴 뿐 정작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묘사도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북유럽의 여름 상황이다. 《오디세이아》에는 이런 문장도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어둠이 어디인지 새벽이 어디인지도 구분하지도 못한다. 사람들을 비추는 햇빛이 지하로 내려가지도 않고 그 햇빛이 어디서 솟아오르는지도 알지 못한다.”
게다가 바다는 밝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회색빛이고 그 위에 안개가 끼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튜닉과 무겁고 두터운 겉옷을 입었는데 잔치를 벌일 때에도 그 옷을 벗지 않는다. 호메로스 시에서 지중해의 등록상표인 태양과 따뜻함은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설사 호메로스가 훌륭한 지리학자는 못 되더라도 그 지역에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전형적인 지중해 풍경쯤은 알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데에서 살았던 사람처럼 풍경과 날씨를 묘사하고 있다.
― 2장 구세계의 사라진 문명(74~75쪽)
고대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100년경에 탄생했으므로 우리의 시대로부터 5천 년 떨어져 있다. 거기서 앞쪽으로 5천 년을 더 하면 그 연대는 기원전 8100년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또다시 1천5백 년 앞으로 가면 이라크와 시리아 국경에 있는 터키 고원지대인 괴베클리 테페의 연대가 된다. 고고학적으로는 토기가 만들어지기 전의 신석기시대인 선토기신석기시대, 그중에서 선토기신석기 A시대로 분류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 사원은 A시대의 초창기에 건설되었으며 탄소 연대측정에 의하면 기원전 9500년으로 조사되었다.
― 2장 구세계의 사라진 문명(109쪽)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선사시대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 유럽 전역에서 주석이 교역되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청동기시대라는 것이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와 그 시대의 주요 원료(주석과 구리)는 유럽 대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잃어버린 문명의 잔해들이 발견되고 있으나, 미국 고고학자들은 이런 유물을 인정하고 평가하는 것을 망설여왔다. 그리하여 누가 그런 유물 혹은 구조물을 건설했는지 그 객관적 진실이 영원히 실종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유럽의 광산에서 채광된 것보다 더 많은 구리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양의 구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좀 괴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대답은 아메리카이다. 유럽의 청동기시대에 다량의 구리가 북아메리카에서 채광되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아메리카에서 채광된 구리가 아메리카 대륙의 어디에서 소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곳에서는 사용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 3장 신세계의 사라진 문명(129쪽)
결국 버로우스 동굴 이야기는 다른 고고학적 발굴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다. 다른 유사한 발견 사항들을 살펴보면서 그 이름만 한번 바꾸어 넣어 보라. 그러면 전반적인 줄거리가 아주 비슷하게 나올 것이다. 우선 고고학계의 반발이 있다. 고고학자들은 제시된 유물들이 명백한 가짜라고 비난한다. 학계는 아메리카에 처음 온 유럽인은 콜럼버스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이전에 건너온 유럽인들의 유물들은 가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이라고 해서 사정은 별반 나을 것이 없다. 버로우스는 대부분의 아마추어 조직들 내에 존재하는 치열한 싸움과 논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대비하지도 못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산 채로 잡아먹혔고 그의 이야기 또한 그런 신세가 되어버렸다.
― 3장 신세계의 사라진 문명(141쪽)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언급한 이래, 세상은 그것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양분되었다. 회의론자들은 입을 모아 아틀란티스가 실제로 존재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 허구성을 자명하게 ‘알고’ 있으며 그것으로 설명이 충분히 된다는 태도이다. 그들은 플라톤이 역사가라기보다 철학자라는 입장을 취한다(그러나 이런 구분은 고대 그리스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플라톤이 아틀란티스를 이상사회의 한 전형으로 창조하여 고대 그리스와 대비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플라톤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에 관한 책 속에서 이 잃어버린 문명을 언급한 것이다.
― 4장 사라진 문명, 아틀란티스(193~194쪽)
하와스는 여러 가지 사항과 관련하여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집트학이라는 학문 자체도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1840년경에 이집트 역사의 패러다임이 정해졌고 그 이후에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도그마를 유지하기 위해 진지한 과학적 증거도 무시되었고, 하와스와 다른 많은 ‘학자들’은 그 교리를 신주단지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다.
1984년에 기자 고원에서 85개의 샘플이 추출되었고, 그중 스핑크스에서 나온 5개가 탄소 연대측정을 받았다. 그 결과, 연대는 기원전 3809년에서 2689년 사이로 밝혀졌다. 이 연대는 기존에 받아들여진 기자 피라미드 건설 시기에서 2백 년 내지 1천2백 년 앞서는 것이다. 보발은 마크 레너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기자 피라미드는 이집트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4백 년이나 앞서서 건설되었다.
― 4장 사라진 문명, 아틀란티스(212쪽)
1958년, 예일 대학의 과학사학자인 데릭 J. 드 솔라 프라이스는 우연히 이 물건(안티키테라 기계장치)을 만나게 되었고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대중과학 잡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관련 논문을 실었다. 그가 느낀 특이한 점은 그 물건의 독특함이었다. 드 솔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기구 같은 물건은 다른 데에는 그 어디에도 보존되어 있지 않다. 고대의 어떤 과학적인 서술이나 문학적인 암시에서도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우리가 아는 헬레니즘시대의 과학과 기술 분야를 생각해보면 이런 물건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야 마땅하다.” 그는 이를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제트기를 발견한 것과 같다고 비유하면서 처음에는 그 기계가 1575년에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학계는 기원전 1세기라는 시간은 입증은 고사하고 용인조차 어려웠다.
― 5장 선사시대의 천재 정신 (242~243쪽)
오늘날 안티키테라 기계장치는 최초의 계산기이자 컴퓨터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프라이스는 안티키테라 기계장치를 ‘어느 면에선, 현재 나오는 많은 과학 장비들의 존경할 만한 선조’라고 분류했다. 원본 기구가 아테네의 국가 천문학 박물관의 청동 제작품 콜렉션에 복제품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또 다른 복제품이 미국 몬태나 주 보즈먼의 미국 컴퓨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 기구에 사용된 소재는 청동이지만 그 정신적 설계는 컴퓨터니까.
― 5장 선사시대의 천재 정신(252쪽)
르플런전이 그의 저서에서 무의 잃어버린 문명을 다루었지만, 무 대륙이 오컬트 전통의 신비로운 탄생지라 주장하며 잃어버린 대륙을 널리 알린 것은 신지학자 헬레나 블라바츠키였다. 하지만 무 대륙을 이론과 추측에서 구제하여 현실적인 화제로 끌어올린 것은 제임스 처치워드였다. 그는 인도의 비밀스러운 도서관에 안내되었을 때 무 대륙의 구체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 6장 지구, 기원전 수만 년 전 '잃어버린 대륙, 무'(274쪽)
석기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발전되어 있었지만, 과학계는 이 시대의 발전을 인정할 수 없는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바로 문자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문자가 발명되지 않았고, 그래서 과학계는 문자 이전에 나온 모든 것을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 문명이 이뤄낸 상당한 과학적인 성취를 아예 무시해버린다. 당시 선조들은 글자는 없었을지 몰라도 분명 말은 있었다. 실제로 역사의 시점을 훨씬 앞쪽에 둘수록 언어의 가짓수는 점점 적어진다. 러글리는 이런 현상에 대하여 ‘원(原)언어에 대한 탐구’라는 명칭을 붙였다. 학계는 다양한 종류의 분류를 제안했고 가끔 그들이 도출한 결론에 동의했지만, 요약해서 말해보자면 선조들의 언어 중 일부는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도 이건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10만 년 전에 채광 같은 구체적인 작업을 준비할 수 있었겠는가? 현대의 채광을 한 번 생각해보자. 채광을 하려면 최소한 과학, 사회 조직, 사업 관리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미 수만 년 전에 채광 작업을 했던 선조들에게 우리가 인정하려는 것보다 훨씬 더 진보한 ‘문명’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고고학적 기록이 선조들이 외과 수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을 때, 또다시 역사는 우리가 종종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는 게 드러났다.
― 6장 지구, 기원전 수만 년 전(301~302쪽)
흥미롭게도 동굴 벽화들은 동굴의 깊은 구석에서 발견되었다. 무엇 때문에 우리 선조들은 이처럼 접근하기 어렵고 사회적인 기능도 제대로 안 되는 장소에 벽화들을 그렸을까? 이 의문은 우리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더욱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 1865년, 에드워드 타일러 경은 주술과 선사시대 예술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앙리 브뢰이 같은 프랑스의 선사학자들은 이 벽화들을 사냥용 주술이라고 해석했다. 사냥터에서 죽여야 하는 동물들에게 주술을 걸기 위해 벽화를 그렸다는 것이다. 결국엔 그런 해석이 너무나 순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오로지 15퍼센트만이 사냥터에서 등장하는 동물들을 그린 벽화였다.
― 6장 지구, 기원전 수만 년 전(302~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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