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같으면 싸구려 기념품 가게에서나 볼 수 있었던 천박한 모조품들이 지금 예술이라는 당당한 이름으로 비싼 값에 팔리고 고급의 미술 잡지를 장식한다. 그러고 보면 어린이 공원에서 풍선 인형을 만드는 아저씨도 훌륭한 팝 아티스트가 되는 그러한 세상이 되었다.
인터랙티비티(interactivity)는 단순히 디지털 용어만이 아니고 현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중심개념이 되었는데, 광화문 광장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일방적인 볼거리 제공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차라리 그 전의 은행나무 도로가 더 운치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내가 베니스와 플로렌스를 찾았던 어느 겨울날, 두 도시를 감싸고 있던 몽환적 분위기가 그것이었다. 그 순간 그 장소에서만 느꼈던 단 한 번의 분위기, 시간과 공간이 조금만 어긋나도 다시 찾을 수 없는 미묘한 느낌, 바로 옆에 있지만 어쩐지 먼 과거인 듯 느껴졌던 아득함, 나중에 인위적으로 다시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절묘한 순간이 바로 아우라였던 것이다.
들뢰즈는 70년대 초 파리 8대학에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주요 참고도서로 삼아 철학 강의를 했는데, 30명 정원 강의실에 200명의 수강생이 몰려들어 강의실 뒤편과 복도까지 가득 메웠다고 한다.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자 라캉도 세미나에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자주 언급했다. 일곱 살짜리 여자 아이가 토끼굴 속의 환상적인 나라에서 겪는 기상천외한 꿈의 세계인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만큼 지적이고 철학적인 동화도 없을 것이다.
이미지에는 실재를 죽이는 기능이 있다. ‘욘사마’라는 이미지는 ‘배용준’이라는 실재를 죽여 없앤다. 이미지가 실재를 완전히 뒤덮어 실제의 인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보드리야르가 하이퍼리얼리티라고 이름붙인 가상현실의 세계이다.
우리가 전혀 의심도 하지 않고 견고한 하나의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두 겹으로 나뉜 사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든 것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건전한 의식의 밑바닥에 통제불능의 무의식 혹은 본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고귀한 학문 또는 앎에 대한 의지가 실은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프로이트를 재해석한 라캉이나 역사 속에서의 권력의지를 의학, 사법제도, 섹슈얼리티 등을 통해 세밀하게 들추어낸 푸코가 전 세계 인문학도들을 열광시켰던 이유가 그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시작이다.
신화는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는 듯하면서 사실은 무섭게 강요한다. 문제는 강요당하면서도 강요당한다는 의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반복성, 중독성의 문제이다. 신화는 기호학적 체계인데, 다시 말하면 누군가의 가치가 거기에 투입된 가치체계인데, 신화의 소비자는 그것을 사실체계로 간주한다. 마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듯한 자연 현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문 독자 혹은 TV 시청자로 하여금 순진무구하게 신화를 소비하도록 하는 것은 이처럼 신화가 가진, 소위 역사의 자연화 기능이다.
말은 말하는 주체의 아들이지만, 문자로 된 글은 그가 직접 한 말이 아니라 다시 글로 옮겨진 것이므로 적자(嫡子)가 아니라 사생아이다. 그러므로 문자의 특성은 아버지의 부재이고, 문자의 욕망은 고아의 욕망, 혹은 친부 살해적 찬탈의 욕망에 비유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데리다의 ‘해체’는 소크라테스 이래 지금까지 내려오는 서유럽의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그 철학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릴 것을 주장하는 방법적 실천의 이름이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문자 언어를 폄하하고 음성언어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폭력적인 이성 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로 흘렀다는 것이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이나 레이 가와쿠보의 패션에서 우리는 분리되고, 분해되고, 풀리고, 해체되고, 조각나고, 빠지고, 단절되고, 고장 난 것들이 우리의 시각을 강렬하게 사로잡고 있음을 느낀다. 해체가 우리의 지배적인 시각 환경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 또한 해체로 경도되고 있음을 뜻한다. 탈 권위, 탈 중심이라는 현대적 의식의 도도한 흐름은 해체적 가시성의 풍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서양언어로는 de, dis, ex 등의 접두어가, 한국어로는 탈(脫), 비(非), 반(反) 등의 접두어가 지배하는 해체의 시대이다.
누가 중류층인가? 석유회사 직원, 컴퓨터 프로그래머, 우주선 엔지니어, 마케팅 매니저들이다. IBM, 뒤퐁(DuPont) 같은 회사들은 톱클래스가 아닌 대학 졸업생들을 고용하여, 그들이 일단 조직의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며 충성심을 유도한다. 직업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들은 수동적으로 되고, 자신이 거대한 조직의 교체 가능한 한 부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차츰 인간성을 상실해 간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그것이 자기 노력에 의해서 버는 것이라면 (영화배우가 대표적이다), 비록 그의 수입이 엄청나고 그의 씀씀이가 최상층의 그것을 흉내 낼 수 있는 정도라 하더라도, 그는 최상류층의 일원이 될 수 없다. 엄청난 재산의 영화배우들이 재산에 걸맞지 않게 좌파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올드머니(old money)의 이론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 속칭 올드머니로 불리는 상속 재산이야말로 최상의 상류 계급을 규정하는 필수불가결의 원칙이다.
“우리 사회에서 보상은 타인의 존중(esteem)과 존경(admiration)이고, 징벌은 무시(neglect)와 경멸(contempt)이다. 타인으로부터 존중받고자 하는 욕망은 굶주림에 버금가는 거의 자연적 욕망이고, 세상의 무시와 경멸은 통풍(痛風)이나 결석(結石)에 비견되는 고통이다.”
정부가 모든 시민이 평등하다는 환상을 심어줄수록 시민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기 위해 더욱 피나게 투쟁한다. 미국 사회는 ‘모든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고, 아무도 하찮은 사람이 아닌 그런 사회’(everybody is somebody, nobody is anybody)를 지향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민주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더욱 불평등을 느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