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세기가 도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 년 간 지속되었던 냉전체제는 놀랍게도 베를린 장벽에 이어 동구(東歐)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주저앉아 버렸다. 전 세계를 양분(兩分)하여 지구촌 곳곳에서 대립하던 동서 간의 이데올로기가 이로써 그 첨예한 경쟁시대를 마감한 것이다. 새로운 국제질서가 지체 없이 구체제를 대체하였는데, 크고 작은 지역 단위의 다양한 경제블록이 상징하는 경제경쟁 시대가 등장한 것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매우 다르게 경제경쟁체제가 추구하는 시장경제는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비싸고 조악(粗惡)한 제품은 값싸고 실용적이며 양질의 제품에 밀리면서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거대한 세계시장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국가들은 가격과 생산량을 결정할 수 있는 일등 제품을 만들거나 값싸고 실용적인 상품으로 경쟁력을 높이기에 그치지 않고, 천연자원자재를 관리하고 시장성을 조절하며 노동력의 고(高)상품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제경쟁체제는 불과 십 수 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제사회가 국가 간의 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누구나 함께 공감(共感)하는 ‘숨 고르기 운동’이 이른 바 문화 코드이다.
경제경쟁체제와 문화코드가 동아시아에 이슬람과 유교문화의 복고(復古)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示唆)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시대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의 제도화를 통하여 구체화되고 있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과 한중일 등 동북아 3국, 그리고 남아시아의 대국 인도가 ASEAN+3+1로 거대한 협력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외곽에서 감싸고 있는 것이 아태경제협의체(APEC)와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이다. 이들 다양한 국제협력체의 중심에 동남아가 우뚝 서게 되었다. 아세안으로 하나된 동남아는 5억(2006년) 인구를 포용한 넓고 역동적인 시장과 양질의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시대의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는 전통적으로 불교문화권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동남아와 함께해야 할 동북아의 유교문화코드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보다 상생적인 상대는 불교가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동남아에서 이슬람은 불교와 가톨릭을 제치고 가장 많은 종교 인구를 포용하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이며,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는 무슬림 국왕이 국가원수이며, 싱가포르도 이슬람정책에 인색하지 않으며, 미얀마와 태국과 필리핀과 베트남까지 정치적으로 핍박(逼迫) 받는 무슬림 사회가 건재하다. 동남아를 깊이 알기 위해서 이 지역의 이슬람과 무슬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선결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지난 2000년에 출판된 『동남아의 이슬람』은 2002년 문화관광부가 선정하는 인문학분야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되어 한 차례 재판(2쇄)을 발행하였다. 서명(書名)이 다소 새로웠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후, 2005년부터 3년에 거쳐 개정판을 위한 보완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동안 총4장을 새로 써서 ‘인도네시아 이슬람’ 보완에 힘썼다. 전체적으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대별하여, 전반부는 “동남아 이슬람과 이슬람문화”로, 후반부는? “동남아 각국의 이슬람 현황”으로 분리하였다. 이 개정판에는 이슬람 분쟁지역과 캄보디아를 보완하기 위하여 장준영 교수(한국외대)를 초청하여 집필 교수가 열 분으로 늘어났다. 이슬람의 이해는 손주영 교수(한국외대), 말레이시아는 류승완 교수(국립말레이시아대),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정치변동은 제대식 교수(영산대), 싱가포르는 김성건 교수(서원대), 필리핀은 유왕종 교수(인천대), 태국은 이병도 교수(한국외대), 베트남은 김종욱 교수(청운대), 미얀마는 박장식 교수(부산외대)가 집필한 것이며, 기타는 양승윤(한국외대)이 맡았다.
제1장의 ‘동남아의 이슬람과 중동의 이슬람’은 원래 개정판 서문으로 준비된 것이다. 제1장에 나타나 있듯이 동남아의 이슬람은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문화적 특성이 동남아를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의 강대국이 화합하고 경쟁하는 동아시아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한국에 그리고 한국의 역할을 짊어지게 될 젊은 역군(役軍)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2007년 만추(晩秋)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양승윤 씀.
---저자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