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향해 달려가는 그 자동차 안에서,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헛 살았고 가짜로 살았다고 고백하듯 말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면 놀랄 것이다. 이젠 그렇게 살지 않을 거다. 윤희가 나에겐 유일한 희망이다."
그녀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 대신 그에 대한 자신의 전적인 신뢰를 표시하는 뜻으로 그의 품 속에 안겼다. 정말이지 정치 같은 것에는 티끌만큼이 관심도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그 남자 한 사람이었다. 그것으로 그녀는 말이 필요없다는 뜻을 전했고, 그것으로 그는 말이 필요없다는 뜻을 전달받았다. 그들은 오래 침묵했다.
"내가 당신에게 희망인 것처럼 당신은 나의 희망이에요. 난 언제나 한 자리에 있을 거예요."
차에서 내리기 전에 그녀가 한 말이었다. 그는 고맙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그는 손수건을 건냈다. 그녀는 그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그것을 손에 말아 쥐었다. 그것이 긴 이별의 시작일줄을, 그녀는 몰랐다. 그렇지만 예감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차가 떠나갔는데도 자꾸만 눈물이 나와서 견딜 수 없었다고 어머니는 회상했다.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터져올라오는 듯한 무겁고 비장한 슬픔이 목을 타고 넘어오더라고, 참으려고 해도 안 되더라고, 처음에는 실처럼 가느다랗던 울음이 폭포수와도 같은 오열이 되고 통곡이 되어 땅바닥에 그녀를 주저앉히더라고, 그것이 그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징후가 아니었겠느냐고 어머니는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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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들 속에서 나무들은 흔히 요정이 변신한 것으로나온다. 요정들은 신들의 욕정과 탐욕을 피해 육체를 버리고 나무가 된다. 신들은 권력을 가진 자이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한결같이 탐욕스럽다. 그들의 욕망은 도무지 좌절되는 법이 없다. 그들의 절대욕망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변신이다. 탐욕스런 권력자인 신들의 욕망으로부터 자신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요정들은 어쩔 수 없이 나무가 된다. 나무들마다 이루어지지 않은 아프고 슬픈 사랑의 사연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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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마다 한 번씩 바다를 건너가는 나무를 상상했었지만, 그러나 그 나무가 밤마다 한 번씩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사연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부분이 빠져 있었으므로 내 상상은 불안전했다. 하지만 불안전한 내 상상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녀가 꿈을 꾼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해몽은 자의적이고 엉터리다. 나는 그렇게 파념치해지고 싶진 않다.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 그 문장이,미리 대기하고 있던 것처럼 불쑥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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