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막 중 -
“뭐하시는 거예요?”
“이건 네 운명에 어울리지 않아. 네가 읽어야 할 건 제레드의 유물이야. 읽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돼. 너에게 주려고 잘 간직해두었다.”
케인은 서부 반도에 관한 책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종이들이 시커멓게 그을리고 타버려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악마는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어머니 안에 있어요, 어머니. 맹세해요. 어머니 말씀처럼 올 테면 오라고 해요. 정말 그런 게 있다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죠?”
어머니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으려고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았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말을 조심해라, 데커드. 네가 지금 뭘 불러들이는지도 모르고…….”
“올 테면 ‘오라고요!’”
그의 날카로운 외침이 밤하늘을 가르며 메아리치다가 다시 돌아왔고, 조금씩 사그라졌다. 순간 세상이 고요해졌다. 데커드는 차가운 얼음으로 간질이는 듯 맨다리를 휘감는 바람을 분명히 느꼈다. 흥분과 두려움, 변화에 대한 순간적인 열망으로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이곳을 떠나게만 해준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떠나지 못하면 아버지처럼 평생을 무두장이로 일하거나, 가끔씩 마을을 찾아와서는 무너져 가는 호라드림 수도원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딱 벌리는 여행자들에게 고기나 팔다 죽으리라. 케인은 여기서 죽을 것이고, 뼈는 땅속에 묻혀 아무도 그가 언제 살다 갔는지 기억하지 못하리라.
“저도 믿고 싶어요. 하지만 믿을 수가 없어요.”
케인은 갑자기 피로를 느끼며 말했다.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나도 널 도울 수 없단다. 너는 이미 패배했구나.”
그녀가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는 뒤돌아 떨리는 손으로 문을 더듬은 뒤, 등불을 탁자 위에 그대로 둔 채 방을 나갔다.
어머니를 뒤따라가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고, 죄송하다고 말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데커드의 다리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등불의 불빛이 투명한 존재의 숨결에 닿기라도 한 듯 깜박거렸다. 벽의 그림자가 너울거렸다. 순간, 속삭임을 들은 것 같았다.
“데에커어어어드…….”
데커드는 열려 있는 조그만 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창으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가 흘러들었는데,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가운 것 같았다. 창가로 다가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살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어둠과 안개가 보였고, 멀리 벌판 쪽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애처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꽁무니를 빼고는 쓰레기를 찾아 주택가로 사라지는 떠돌이 개처럼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케인은 언덕 위의 옛 수도원을 올려다보았다. 수도원은 쓰고 버린, 껍질만 남은 것 같은 낡은 모습으로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문득 자신의 오만함에 공포를 느낀 그는 옷을 단단히 여민 뒤 몸을 떨었다. 마음속으로 자신 앞에 분명하게 펼쳐진 듯한 길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현실의 삶은 그런 신화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부 반도에 관한 책을 집어 들자 검게 그을린 가장자리가 부스러져 손 안에 떨어졌다.
‘올 테면 오라지.’
오십 년 후가 되겠지만, 데커드 케인의 소망은 이뤄질 운명이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