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터 수원, 인천, 강원, 대전, 대구, 광주, 부산, 그리고 제주도까지 전국에 흩어진 435곳의 전통시장을 다니며 기록하면서 언제나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지나고 보니 매 순간이 내게 위로였다. 여전히 부끄러운 부분이 많은 글이지만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 나를 시장으로 이끌었던 호기심만큼은 놓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생생한 모습을 담기 위해 찰옥수수를 파는 할머니 옆에서,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던 어두운 시장 골목에 주저앉아서도 글을 썼다.
우리 시장에서 놀까요?(본문 5p)
“배 터지게 먹고 안 사도 되니 구경하고 가요!”
이렇게 장사해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손님이 담은 과자의 무게만큼 가격을 매기기 때문에 값은 우수리가 100원 단위로 10원 단위로 제각각 떨어졌는데 그럴 때면 시원하게 100원 단위는 깎아 주시니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재치 있는 입담도 장삿속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왕 시장에 왔으니 배불리 먹다 가라는 아저씨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할머니 마음처럼 푸근하고 정다워라(대전 _ 중앙시장, 본문 20p)
유성장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본래 유성장이 서는 날짜가 5일과 10일이었는데 워낙 재미있다고 소문이 나서 비마저도 장날을 반가워했고 장이 서는 날마다 비가 쏟아져서 어쩔 수 없이, 비가 눈치채기 전에 날짜를 4일과 9일로 바꿨다는 것이다.
특정일에만 나타나는 도심 속의 신기루(대전 _ 유성오일장, 본문 70p)
칠십 평생을 남성로에서 사셨다는 어르신의 설명이 이어졌다. 길 양쪽으로 기와집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고 한 집 걸러 한 집 이 약재상과 한약방이어서 빈 곳을 찾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이다. 기와집을 등 뒤에 두고 직접 캐온 약초를 거래하며 작두로 썰어서 파는 풍경이 일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남성로에 들어서기만 하면 코가 막힌 사람도 뻥 뚫렸어.”
한약재를 싣고 마차가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다(대구 _ 대구약령시, 본문 93p)
“이 가게에만 저울이 남아 있네요. 아직도 저울을 갖고 계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어요.”
“특별할 것까지는 없고 가게랑 거진 반세기를 같이 했는데 쓸모없다고 버리는 건 의리가 아니잖아.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놔둔 거지.”
홍어맛이 제대로인 남도의 시장(광주 _ 양동시장, 본문 146p)
예술이라는 새 옷을 입었을 뿐 대인시장은 오래된 정이 푹 익은 곳이었다. 처음에 오가는 사람이 적다는 이유로 돌아섰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놓쳐 버렸을까. 내 인생의 행운이 모두 이곳에서 소진되어 버린다고 해도 나는 아쉽지 않을 것 같았다.
365일, 예술이 녹아드는 장터(광주 _ 대인예술시장, 본문 194p)
시장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새로운 재미가 하나씩 더해졌다. 상인들의 볼멘소리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꾸하는 손님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들어보니 전국의 모든 사투리가 한 번씩 들렸다. 시장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를 압축한 것 같았다. 다양한 인물 군상이 섞여 있고 돈과 정을 서로 주고받으며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끝에는 감동이 밀려온다. 이토록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를 나는 본적이 없다. 그 전에 나는 이만큼 치열하게 살았던 때가 있었나 반성도 해 본다.
자갈이 많아 자갈치(부산 _ 자갈치시장, 본문 256p)
평생을 제주에서 사셨다는 할망은 나의 철없는 질문에 또박또박 답을 해 주셨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할망 옆에 딱 붙어 앉아서 제주 할망과 아즈망제주 사투리로 아주머니에게 채소를 팔기 시작했다.
“깻잎은 한 줄에 1,000원! 대순은 원래 7,000원은 받아야 하지만 기분 좋으니 오늘만 5,000원!”
그린 라이트 맞습니다(제주 _ 동문시장, 본문 282p 중에서)
내가 서귀포예술시장에서 느꼈던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인연은 아니었지만 못된 문방구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무척 기뻤고 또 고마웠다. 제주도의 할망과 육지의 할머니들이 가깝고 편리한 마트를 집 앞에 두고도 먼 길을 자청하면서까지 시장을 찾는 이유가 내가 느낀 이 고마움이 라는 감정 때문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동안 글과 말로는 시장에는 정이 있다고 해 왔는데 그 정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따져 물으면 머뭇거렸다.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이라는 것을.
예술로 즐거운 보물찾기(제주 _ 서구포예술시장, 본문 310p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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