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간 노동을 제도나 정책으로 바로 잡을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장시간 노동은 우리 시대 세계 전체의 특유한 여러 구조와 얽혀 있다. 장시간 노동은 우리의 삶 전체를 예속하는 복잡한 원인들이 얽히고설킨 통치의 산물이다.
장시간 노동이라는 예속을 해체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쁜 게 좋은 거야”라는 자조 섞인 위안,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자”는 위기의식, “그래도 늦게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 상사 눈밖에 안 나지”라는 통념, “젊을 때 일을 안 하면 나중에는 일할 수 없다. 야근은 축복이다”라는 왜곡된 신념이 뒤섞이면서, “어쩔 수 없지”라는 푸념만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가?--- p.30
출산이나 육아를 이유로 노동 시장을 떠난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자 지위를 불안해하고, 재취업 때 하향 이동을 할 수밖에 없는 노동 현실 속에서 두려움에 휩싸인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출산과 육아의 부담보다는 육아가 끝난 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막막함에서 더 크게 생겨난다.
보통 육아 부담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출산을 지연하거나 회피한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육아→경력 단절→사회 단절’을 더 두려워한다. 출산 지연이나 회피에는 육아로 환원될 수 없는, 미래가 주는 두려움이 짙게 반영돼 있다. 노동 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경력 단절과 사회 단절의 불안이 배가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아 정책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경력 단절과 사회 단절을 해소할 수 있는 일자리 정책과 남성주의적 장시간 노동 문화를 개선하는 정책이 함께 추진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p.47
성과급은 아주 매력적인 당근이자 치명적인 독약이다. 개별 노동자의 처지에서 소득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성과급은 매력적인 당근이다. 그렇지만 경쟁적인 성과급을 얻으려면 계속 달려야 하기 때문에 독약이기도 하다. 경쟁적인 성과급은 사람들을 만인의 만인을 향한 무한 투쟁 상태로 내몬다. 덧붙여 개별 노동자들이 소득을 극대화하려는 태도를 순수한 개인의 선호나 선택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겉으로 보면 자발적인 선택이기는 하지만 낮은 수준의 저임금 구조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하다. 성과를 미끼로 하는 장시간 노동 관행은 이렇게 저임금 구조와 연결돼 있다. 한편 열정과 능력의 이름으로 채색해 매일 이어지는 야근을 미화하는 사례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왜곡된 열망이자 착취의 새로운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p.67
경쟁력 담론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경쟁력 개념이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도시, 지역, 교육 나아가 개인의 자유 시간에도 확장돼 작용한다는 점이다. 최근 휴가의 종류가 많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휴가도 경쟁력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이 따라붙으면서 우리는 휴가 기간에도 경쟁의 무기를 갖추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냥 놀면’ 죄악이다. 휴가의 종류가 어느 때보다 많아 보이지만, 실상을 뜯어보면 어느 때보다 초라해진 게 경제 위기 이후의 휴가다. 휴가는 업무의 연장이며 경쟁력을 제고해야 하는 생산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유 시간의 영역까지 파고든 경쟁력 담론은 경제 위기 이후 우리의 삶과 세계관을 옭아맨 신자유주의의 최대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p.70
24시간 ‘회전하는’ 사회는 사실 24시간 ‘늘 피곤한’ 삶이기도 하다. 교대 근무자의 건강에 관련된 연구를 보면, 교대 근무자 중 절대 다수가 수면 장애를 호소한다. 심야 노동은 ‘또 다른 이름의 발암 물질’이라는 세계보건기구의 경고를 되새겨 봐야 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조 조합원 중 교대 근무자 1773명과 비교대 근무자 267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주는데, 교대 근무자 중 84퍼센트가 수면 장애를 호소한다. 수면 장애 말고도 식욕 부진과 소화 불량, 변비 또는 설사, 복부 팽만감, 메스꺼움 같은 위장관 증상과 소화성 궤양은 물론, 당뇨병, 갑상선 기능 항진증 등이 악화된다고 한다. 최근에는 뇌졸중, 심근 경색 같은 심혈관 질환, 암, 자연 유산, 조산, 저체중아 출산 같은 생식 보건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여성환경연대는 “야간 근무자는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평균 수명이 10년 이상 짧다”고 봤다. “밤에는 잠 좀 자자”, “노동자는 올빼미가 아니다”라는 심야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pp.123-124
미디어에서는 성공한 최고 경영자를 미화할 때마다 “나는 월화수목금금금 일을 했다”는 이야기를 강조한다. 월화수목금금금 일한 끝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신화는 미디어를 타고 반복 재생산된다. 어떤 경우 장시간 노동은 능력, 지위, 자긍심, 우월감, 유능함, 안정감, 아버지다움, 남편다움의 상징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런 현실은 ‘성공 신화’와 장시간 노동으로 대표되는 ‘남성주의적 노동 규범’이 매우 강력하게 결합돼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나 ‘국민성’으로 여겨지는 장시간 노동은 분명 일종의 ‘국민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장시간 노동을 질병으로 인식해야 한다. 병에 관한 냉철한 인식이 과로 사회를 해체하는 첫걸음이다. 그래야 양방이든 한방이든 치료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장시간 노동은 우리를 모두 피해자로 만드는 고질병이다. 개인 시간, 가족 시간, 지역 활동, 육아 참여, 사랑할 시간, 연대할 시간, 상상할 시간의 희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장시간 노동은 우리를 모두 만성 피로와 질병에 시달리게 하고, 결국 삶의 질을 총체적으로 하향화한다.
--- pp.180-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