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지식’의 물음에 대한 사회학적 관심은 애초부터 그 개념들이 사회적으로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티베트 승려에게 ‘실재하는’ 것은 미국의 사업가에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범죄자의 ‘지식’은 범죄학자의 ‘지식’과는 다르다. 따라서 ‘실재’와 ‘지식’의 특정한 결합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관련되며, 이 관계들은 그 맥락에 대한 적절한 사회학적 분석에 포함되어야만 할 것이다. (……) 그러므로 지식사회학은 한 사회에서 ‘지식’으로 여겨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어떤 기준에 의해서든) 그 ‘지식’의 궁극적인 타당성 여부에 관계없이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모든 인간 ‘지식’이 사회적 상황 안에서 발전되고 전달되고 유지되는 한, 지식사회학은 하나의 ‘실재’가 일반인들에게 당연한 것으로서 굳어지게 되는 방식으로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지식사회학은 실재의 사회적 구성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pp.13-14
지식사회학은 사회에서 ‘지식’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말은 지성사에 초점을 두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라기보다는, 지성사가 지식사회학의 주된 초점이 되는 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론적인 사고, ‘사상,’ 세계관Weltanschauungen은 사회에서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 이론적인 사고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지식사회학을 지나치게 제한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론적 사고도 ‘지식’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분석틀 안에 놓이지 않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불만족스럽기도 하다. ---pp.30-31
일상생활의 실재는 나아가 나에게 상호주관적인 세계, 곧 다른 이들과 함께 공유하는 세계로 나타난다. 이 상호주관적인 세계는 내가 의식하고 있는 다른 실재들로부터 일상생활을 날카롭게 구분해준다. 나는 꿈의 세계에서는 혼자이지만, 일상생활의 세계는 그것이 나 자신에게 실재하듯이 다른 이들에게도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로 나는 지속적으로 다른 이들과 교섭하고 소통하지 않고서는 일상생활 안에 존재할 수 없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이 세계 안에서 나의 의미와 그들의 의미 사이에 지속적인 일치가 있다는 것, 곧 우리가 그 실재에 대해 공통의 의미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인 세계를 가리킨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자연적 태도는 상식적인 의식의 태도이다. 상식적 지식은 내가 정상적이고 자명한 일상생활의 일과 가운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지식이다. ---pp.45-46
나의 일상생활의 지식은 상관성에 의해서 구조화되어 있다. 이 상관성 가운데 어떤 것은 나의 당면한 실용적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되고, 어떤 것은 사회 속에서 나의 일반적 상황에 의해서 결정된다. (……) 그래서 미국 사회에서 객관화된 지식 저장고에 의하면, 별들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것은 주식 시장 예측과 상관없는 일이지만, 어떤 개인의 말실수를 연구하는 것은 그의 성생활에 대해 알아내는 데 상관이 있다. 반대로 다른 사회에서는 점성술이 경제학에 고도로 관련될 수 있으나, 담화분석은 성애적 호기심과 그다지 관련 없을 수 있다. ---pp.76-77
제도적 세계의 객관성은 개인에게 아무리 거대하게 보일지라도 인간에 의해 생산되고 구성되는 객관성이다. 인간 활동의 외재화된 산물이 객관성이라는 특징을 얻게 되는 과정이 객관화이다. (……) 외재화와 객관화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과정 가운데 있는 계기들이다. 이 과정에서 세번째 계기는 내재화인데(객관화된 사회적 세계는 내재화에 의해서 사회화의 과정에 있는 의식 안으로 되돌아온다), (……) 사회적 실재 안에 있는 이 세 변증법적 계기들의 근본적인 관계를 볼 수 있다. 각각의 계기는 사회적 세계의 근본적인 특성들에 상응한다. 사회는 인간의 산물이다. 사회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인간은 사회적 산물이다. 이 세 계기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뜨린다면, 사회적 세계의 분석은 왜곡될 것이라는 점은 이미 명백할 것이다. 사회적 세계가 새로운 세대로 전달(즉, 사회화에서 이루어지는 내면화)되어야만 근본적인 사회적 변증법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첨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pp.102-103
모든 개인은 객관적인 사회구조 안에 태어나며, 그 안에서 자신의 사회화를 맡고 있는 중요한 타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 중요한 타자들은 그에게 부과된다. 개인의 상황에 대한 그들의 정의가 그에게 객관적인 실재로서 상정된다. 그래서 그는 객관적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객관적 사회세계 안에 태어난다. 이 세계를 그에게 중개해주는 중요한 타자들은 중개의 과정에서 그 세계를 수정한다. 그들은 사회구조 안에서 자신의 위치에 따라,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이고 생애에 뿌리내린 특이성들에 의해서 그 세계의 측면들을 선택한다. 그 사회세계는 이러한 이중적 선택을 통해 개인에게 ‘여과된다.’ 그래서 하위계급의 아이들은 단순히 사회세계에 대한 하위계급의 관점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가 (또는 누구든지 그의 일차적 사회화를 맡고 있는 다른 개인들이) 전한 특이한 색채 안에서 그것을 흡수한다. 동일한 하위계급 관점이 만족감을, 포기를, 쓰라린 원망을 또는 격렬한 반항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하위계급 아이는 상위계급 아이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옆집의 하위계급 아이와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살게 될 수 있다. ---p.202
우리의 지식사회학 개념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개념의 사회학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학이 과학이 아니라거나, 그 방법이 경험적이지 않아야 한다거나, 또는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학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다루는 과학들과 함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구체적인 의미에서 사회학은 인문 분야이다. 이러한 개념의 중요한 결과는 사회학이 역사학과 철학 모두와의 지속적인 대화 가운데 수행되어야 한다는, 또는 적절한 탐구의 대상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상은 진행 중인 역사적 과정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이 살고 있으며, 또한 인간을 만드는 인간세계의 부분으로서의 사회이다. 이 경이로운 현상에 대한 우리의 감탄을 다시 깨닫게 한 것은 인문주의적 사회학의 가장 중요한 열매이다. ---p.283
우리는 일상에서 실재를 질서 지어진 것으로 경험한다는 저자들의 논의 때문에 이 책의 보수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았다. (……) 그러나 무언가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우리를 얽매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해방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있었던 것들이 사실상 역사적 사건들, 사회적 힘들, 또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것을, 곧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그 당연한 믿음 안에 갇혀서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을 꿈꾸는 상상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한다. 그런 뜻에서 ‘사회적 구성’이라는 아이디어는 억압받는 자들에게 폭로와 비판 그리고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훌륭한 사회학적 무기이다. 이 세계는 우리가 만든 것이기에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세계이다.
---pp.297-298, 「역자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