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점에서 본다면 경관은, 즉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우리가 삶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영위하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상이다. 그래서 경관이 아름다움은 우리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경관이 추악함은 우리 삶이 추악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경관에 나타나고, 추악한 삶은 추악한 경관에 나타난다. 하지만 오늘날 의학에서 피부병의 원인이 피부에만 있지 않고 오장육부에 퍼져 있으며, 그 피부병의 치료나 피부의 치장이 겉껍질에 이런저런 약을 바르는 데에만 있지 않다는 과학적 지식이 살아나고 있듯이, 경관을 제대로 볼 줄 아는 것이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환경의 건강함을 지키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 p.17
그러니 내친김에 景이라는 글자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자를 자세히 뜯어보면 서울을 가리키는 京과 해를 가리키는 日이 합쳐진 것임을 우선 알 수 있다. 좀 더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면 日이 京 위에 올라가 있음을 찾아낼 수 있다. 자, 여기에서 섬광 같은 단서가 여러분들 머리를 치고 나오지 않는가? 景은 바로 ‘서울 하늘에 해가 떠 있는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京이라는 글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알고 보면 景의 뜻이 또 한 번 근사하게 풀이된다. 景은 높은[高] 터전[小←丘=언덕]에 크게 지은 궁전의 모양을 본뜬 글자라고 한다. 이제 景의 뜻이 상당히 명백해지지 않는가? 景은 ‘서울 하늘에 해가 떠 있는 모습’일뿐 아니라 ‘서울의 핵심인 왕궁의 하늘에 해가 떠 있는 모습’인 것이다. … 이것이 바로 景이라는 말의 어원이고 유래이다. --- pp.41-42
내 눈과 지평선의 소실점을 연결하는 시선에 걸리는 모든 사물들, 그것들은 높은 산이기도 하고, 우람한 나무이기도 하고, 푸른 초원이기도 하고, 휘감아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높고 낮은 집이기도 하고, 쭉 뻗은 고속도로이기도 하고, 강물에 걸린 다리이기도 하고, 높은 굴뚝이기도 하다. 그것은 깊이를 모르는 시궁창이기도 하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이기도 하고, 희뿌연 매연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이미지를 만들고, 우리 눈에, 우리 머리에, 우리 마음에 잡힌다. 그것이 우리가 우뚝 선 자세로 바라보는 바깥세상의 모습인 ‘경관’이다. 그러니 서 있는 자리는 발 묶인 현실이고, 지평선은 아련한 미래의 희망이다. 그러나 뒤쪽은 잊어버린 과거일 뿐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 묶인 발을 떨쳐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의 눈은 속도가 점점 빨라질수록 그 시야도 점점 좁아져서 그저 앞쪽만 열심히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속도가 빨라질수록 눈앞에 놓인 사물의 자세한 모습은 잊히고 눈은 저 먼 곳을 지향하게 된다. 그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일수록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쪽만 바라보고 달리게 된다. 좌우에 놓인 사물은 앞쪽의 초점을 강조해주는 장치물이 될 뿐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세계가 펼쳐지기를 바라니, 이것이 우리가 우뚝 선 자세를 허물고 동물의 본능을 살려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면서 힐끗힐끗 쳐다보는 바깥세상의 모습인, 또 다른 경관이다. --- pp.276-278
여느 책과 달리 경관이라는 책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사람이 고쳐 쓰고, 갈아 끼우고, 찢어 내고 덧붙여서 줄거리나 문장술도 뒤죽박죽이고, 장정도 제본도 들쭉날쭉하다. 옛말도 죽은 말도 숨은 말도 남의 말도 들어 있고, 낙서와 개칠도 남아 있는가 하면, 명필이 쓴 명문도 끼워진 어려운 책이다. 손으로 쓴 부분도 있고, 도장을 찍은 부분도 있으며, 금박을 두른 부분도 있고 금테를 두른 부분도 있는 괴상한 책이다. 그 책은 일기책이기도 하고, 신문기사 스크랩북이기도 하고, 잡지책이기도 하고, … 이처럼 유별난 책을 읽어 내자면 그 독해력이 여간 아니어야 함은 당연하다. 학식이 풍부해 갖가지 어려운 사실을 알아내어야 하고, 경험이 풍부해 갈피를 헤아리고 실마리를 찾아내어야 하며, 의욕이 풍부해 고통스러운 길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때로는 나침반을 들고 언어의 밀림을 헤쳐 나가는 탐험가의 용기도 필요하고, … 때로는 귀를 활짝 열고 하늘의 소리를 듣는 음악가의 환청도 필요하며, 빛의 신비를 찾아 옮기기에 여념 없는 화가의 손길도 필요하다. 그러나 책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책을 쓰고 읽는 까닭도 여러 가지가 있으니 책을 읽는 일에는 황금률이 없다. 경관도 책처럼 다양하니 경관을 읽는 일에도 역시 왕도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처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우리 모두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경관이라는 책은 비록 암호투성이의 거대한 덩어리지만 그것을 제대로 풀어냄으로써 응어리진 삶을 녹일 수가 있고, 풀어낸 것을 다시 엮어냄으로써 버성기는 삶을 부드럽게 할 수? 있기에 그러하다. --- pp.551-552
이제 다시 ‘아름답다’는 말로 되돌아 가보자. 이 말에서 접미사인 ‘-답다’를 떼어 내면 ‘아름’이 남는데, 이 아름은 크게 세 가지로 풀이된다. 그 하나는 두 팔로 껴안은 어떤 물체의 둘레 길이이다. 아름드리 소나무는 그 둘레를 두 팔로 껴안아도 남는 아름차게 굵은 소나무이다. 껍질이 불그레하고 줄기가 곧게 선 노송이니 백두산이나 금강산 언저리에 가야 볼 수 있다. 이 아름이라는 말은 ‘안다[抱]’, ‘껴안다’는 움직씨에서 풀려나온 이름씨인 셈이다. 그러므로 ‘아름답다’는 말은 아름과 같다, 아름만큼 굵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두 팔로 대상을 껴안게 되면 그 대상의 크기를 몸소 체험할 수 있으니 아름은 곧 ‘알음[知]’과 통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두 팔로 껴안았으므로 그 대상은 내 품안에 들어온다. 내 품에 들어온 대상은 나의 것이기도 하고, 나만이 아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아름은 아 이라는 옛말처럼 ‘나[私]’라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이처럼 안음으로써[抱] 대상을 나름대로[私] 잘 알게 되면[知], 그 대상은 내 품에 들어와서 포근하고 앎으로써 친숙하니 몸 뿐 아니라 내 마음에 폭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대상의 질이 상찬할 만한 수준이라고 확인된다. 이제 경관은 눈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내 마음이 다가가서 내 품에 안는 것이다.
--- pp.496-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