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서 안타깝게 거위 무답이의 숨겨진 보석을 찾는 맞다 물건의 허무한 몸짓은 마냥 필사적이었는데, 그뿐인가, 그 물건을 자신의 보석 깊숙이에 안착시키려고 호흡을 맞추는 무답이는 가히 성실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두 놈의 물건은 그러나 애석하게도 끝내 서로 접(接)하지 못했다.
…그러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교접에 실패한 두 놈은 두 날개를 옆으로 길게 펼쳐 요란하게 퍼덕거리면서 흐트러진 깃을 간추리고 몸맵시를 정리했다. 언제 그런 짓을 시도했던가 싶게 몸단장을 하면서도 쉬임없이 괙괙,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언제나 맞다였다.
‘아 참, 주인이 보고 있는 가운데 하려고 하니 잘 안 되네, 젠장!’ 맞다의 거위소리를 만약 사람의 말로 통역한다면 그 내용은 아마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이 거의 순식간에 일어났다.
정신이 다소 얼떨떨해진 상태로 다시 개울로 내려가 돌을 찾고, 무거운 돌을 끌어올려 돌담을 쌓으면서 나는 왠지 거룩하고 장엄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봄이 오니 마당의 짐승들도 바빠지네」에서
기둥을 잘라버리니 정자는 평상이 되었다. 평상이 되어버린 정자를 원하는 위치에 낑낑거리고 옮긴 뒤, 우리는 해체한 지붕의 아스팔트싱글에 박힌 못을 뽑았다. 그리고 잘라버린 기둥을 평상 위에 다시 덧댔다. 비록 쓸모없었지만 목수가 만들었기에 제법 그럴싸하던 정자는 순식간에 누더기 평상이 되어버렸다. 그 ‘순식간’이 꼬박 하루였다.
비 그친 뒤 잠시 갠 무지막지한 폭염에 옷은 땀으로 비 오듯 젖었고, 어깨는 새까맣게 탔고, 몸은 탈진되었으나 퇴골 마당에서 벌어진 그 대역사(大役事)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지금 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1. 책이나 읽는 사람들은 대체로 근육을 쓰려 하지 않는다.
2. 혹시 시골에 집을 짓게 되면 정자 위치를 잘 잡아야 한다. 이 세상의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다.
3. 마음의 땀도 좋지만, 섹스를 포함해 같이 ‘몸의 땀’을 흘린 사람들 사이에는 특별한 우정이 샘솟는다. 이상 끝. ---「정자 기둥을 잘라 평상을 만들다」에서
1667년 폭풍우 몰아치는 어느 날 새벽, 지상의 마지막 도도는 모리셔스섬 블랙리버 협곡 아래 차가운 바위 밑에서 비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도도는 자신이 지상의 마지막 도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오래전부터 다른 도도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이윽고 폭풍우가 지나갔다. 도도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다.
도도를 없앤 것은 바로 우리 호모사피엔스였다. 우리도 도도처럼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다. 이 맹렬한 물신의 시대, 씨알이 안 먹히겠지만, 이런 반생태적 문명을 지속하려 든다면 우리도 도도처럼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참된 자기인식이고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우리도 도도처럼 사라질 수 있다」에서
‘미네르바’라는 인터넷 논객이 지난해 이 나라의 상당수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은 모양이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던가 한번 생각해 본다. 우국(憂國)에 찬 미네르바가 말하는 위기와 불안한 예측,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절망(?)이 자신의 재산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난 한 해에 주식으로 ‘날아가버린 돈’이 물경 46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들리기로, 자그마치 이 나라의 1천만 명이 주식투자를 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딸린 가족을 헤아린다면 참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주식투기판’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내 변함없는 생각은, 미네르바가 누군지 모르는 이웃들, 말하자면 주식을 산 적도 없고, 살 여력도 없고, 앞으로도 그런 투기와 상관없이 살 수밖에 없는 이들도 엄청난 수라는 것이다. 만약 ‘희망’이라는 말을 한번 써본다면 미네르바를 모르고도 살아온 이들에게서 가능한 노릇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권력이 “닥치라!” 하자 냉큼 입 닥치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새 이야기는 재미딱지 없어서 그만 하련다. 문제는 언제나 한결같은 주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일 것이다. ---노나라 처녀의 탄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급기야 대통령은 ‘녹색성장’이라는 도저히 결합될 수 없는 해괴한 말까지도 창안해 내고야 말았다. ‘녹색’과 ‘경제성장’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단 말인가? 본디 어불성설의 달인이긴 하지만, 나는 그가 최소한 환경이야기만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돈이야기를 하면 어울린다. 들을 때 왠지 비참해지긴 하지만, “지금 주식 사면 부자 된다” 그런 말씀은 차라리 ‘그분’에게 어울린다. ---「녹색 ‘생각’이 빠져 있는 녹색 ‘이야기’들」에서
적잖은 도회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시골살이? 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그때 시골살이는 꼭 농사를 지어 살림을 도모하겠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자녀들 교육문제든, 직장문제든 여러 이유로 도시에 묶여서 오래도록 살았으니 노년은 공해에 찌들고 스트레스 많은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조용히 텃밭이나 가꾸면서 인간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그러한 소박한 소망이 너무나 깊이 이해된다. 하지만, 시골에서 자리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시가 소비의 현장이라면, 시골은 뭔가를 낳고 키우고 다듬고 조성해서 마침내 결실을 얻어내는 장소다. 자연이 거저 주는 것도 엄청나지만, 사람들은 작물이라 인정한 것만 선택적으로 키운다. 키워도 아주 정성스레 키운다. 그 외의 것들은 그게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사정없이 배척하는 게 바로 시골의 일이기도 한다. 농부들은 사람살이의 토대인 작물을 키우는 사람이지만, 끊임없이 잡풀이라 간주한 풀들을 뽑고 베어야 하고, 산짐승들을 배척해야 하고, 벌레도 잡아야 한다. 나무도 그냥 놔두지 않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지들을 가차없이 잘라줘야 한다. 농부의 일은 곧 원하는 생명을 위해 다른 생명을 억제하고 차단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의 양 때문에 공장에서 생산한 제초제나 독약을 쓰기도 한다. 나는 농부가 아니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게 솎아내고 배제하는 일에 서툴다. ---「뽕잎 따는 날」에서
2007년 겨울 초입에 느닷없이 이 나라 서해안을 뒤덮은 기름소동만 해도 그렇다. 두말할 것 없이 인간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재앙이다. 그 기름띠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이름없는 민초들이 시방 기름띠만큼의 인간띠를 이루고 있다. 바위를 뒤덮은 기름을 안방의 세간 먼지를 닦듯이 닦아내며 이 가망없는 짓이 과연 끝이 있을까 회의하면서 땀을 흘리고 있다. 닦아내고 걸러내고, 끝이 없는 기름을 훔쳐내다 보면 분통이 터진다. 단지 몇 사람의 실수가 불러일으킨 재앙의 규모가 너무나 크다. 어부들은 기름배가 터지기 전의 청정했던 바다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다. 그때 청정할 때, 바로 그 바다에 대한 감사가 혹시 부족하지나 않았는지 눈물 흘리며 바다의 회복을 염원하고 있다. 이번 기름참사를 통해서도 ‘인간활동의 결과(Human Impact)’가 얼마나 무섭게 해악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배우지 못하면 진실로 바람직한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인다. ---「산촌의 겨울」에서
환경운동을 해서 만들려고 하는 세상도 개인의 기호가 존중받는 세상 아닐까 싶다. 커피가 지구를 망친다면, 그보다 더 심각하게 지구를 망치는 것도 많을 것이다. 커피 말고 차를 마셔서 커피를 마실 때와 같은 어찌할 재간이 없는 쾌락을 느낄 수 있을까? 차야말로 얼마나 반민중적이고 사치스러운가. 차를 생산할 때 대량으로 살포되는 농약이 일으키는 건강의 피해와 땅의 오염, 수질오염은 어이할까? 절의 비구니들이 녹차가 여성에게 안 좋다고 해서 보이차로 관심을 돌린 뒤, 이 나라에 수입된 보이차는 얼마나 가짜가 많은가? 아니 저 유명한 윈난성(雲南省) 보이차는 진위 여부는 고사하고, 왜 그리도 비싸단 말인가? ---「나는 다방커피가 좋다」에서
붕괴와 혼란에 서민 무지렁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고들 하지만, 염려해야 할 최악의 서민 무지렁이들은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중산층이라 할까 중간층, 그들이 언제나 대단한 힘의 원천이었으면서 동시에 고약한 지도자들을 출현시켰던 비겁과 헛된 욕망의 용광로였던바, 그들이 바로 상처를 입을 것이다. 한결같은 지배계층들은 어떤 위기에도 끄떡없으니까 사실 우리가 논의할 대상은 아닌 셈이다. 나는 이 기회에 이 나라의 중간층, 혹은 한때 시민운동이 활발할 때 시민계층이라 부르던 이들이 변화되기를 바란다. 사회의 큰 변화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나올 것인데, 그들에게 참다운 삶은 숫자놀음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소수의 승자만 허락하는 마술 같은 성공신화, 무한정한 욕망의 충족이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옳지 않은 일이었다는 자각이 이번 기회에 퍼지고 깊어지기를 바란다.
환경단체는 지금보다 작아지고, 더 겸손해지고, 더욱 가난해져야 한다. 가난하면 배짱이 생기고 두려워할 게 없어질 것이다. 세상을 망친 자들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같은 방식과 가치관으로 무슨 거창한 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애당초 자기기만이었던 것이다. …작아지고, 낮아지고, 가난해지고, 심각하게 어려워지기를 바란다. 그러면 도리어 없던 힘이 생기고, 그 세진 힘을 세상은 결코 허투루 보지 못할 것이다. 혹 힘이 생기면 그 힘을 허락한 이들과 ‘같이 변하는 데’ 나누기를 바랄 뿐이다. ---「노나라 처녀의 탄식을 넘어서기 위해서는」에서
그분은 5년간 허락된 대통령직의 수행자일 뿐이다. 그런데 그분은 불행하고도 안타깝게도, 이 나라를 마치 영원히 소유하게 되신 것으로 착각하고 계신 것 같다. 이 일을 어이하면 좋을까. 대체로 그렇지만, 그가 하는 말이 곧 그 사람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밝혀둘 일은, 현직 대통령이 하시는 말씀이 곧 ‘대한민국’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역사를 살펴보면, 국토는 국가보다 더 오래갔다. 국가가 국토를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국가가 국토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땅이나 나라는 ‘대통령의 것’이 아니다」에서
오늘 이 나라, 문학이라는 외진 골목길에서 패거리지어 놀고 있는 사람들은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더 나아가 문학에 대해 깊고도 뿌리 깊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세이는 시, 소설이라는 건축물이 조립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톱밥이 아닙니다. 소설이 죽자 이때다, 하면서 새로 탄생한 글쓰기 형식은 더욱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에세이는 당대 사람살이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김종철 선생님 같은 이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문학은 시나 소설이 아니고, 어쩌면 르포작가나 저널리스트들이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구모룡과의 대화, 삼인)”는 발언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생태적 위기와 새로운 글쓰기」에서
‘어쩌다’ 한 글쟁이로서 일찍부터 환경운동판에 뛰어들게 된 필자는 동시대의 여러 예술가가 생태적 감수성으로 현실에 뛰어드는 모습을 적잖이 접할 기회가 있었다. 가능하지 않은 지역에 국가폭력으로 댐을 지으려고 할 때, 한 마을을 송전탑이 가로지르려 할 때, 환경영향평가도 없이 산을 허물어 터널을 뚫으려고 할 때, 멀쩡한 갯벌을 죽여 땅 투기를 하려고 달려들 때, 예술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 예술행동의 동기가 치밀했고, 그 예술행동의 내용에 진정성이 있을 때는 폐부를 찌르는 감동과 반성을 동반했지만, 감동을 주는 일은 드물었고, 환경의 위기를 작품의 질료나 수단으로 삼아 허명을 좇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개
그렇지만 가까운 우리 시대, 아직 그 강렬한 인상과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요즘, 몸으로 현실에 뛰어든 두 가지 ‘몸의 사건’은 한번쯤 짚고 넘어갈 만하다. 새만금 소동으로 발촉된 삼보일배와 한 비구니 승려의 100일이 넘는 단식이 그것이다.
---「삼보일배는 ‘예술행동’이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