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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짜든지 내캉 살아요
중고도서

우짜든지 내캉 살아요

: 시님과 할매 이야기

도정 | 공감 | 2014년 06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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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318g | 140*205*15mm
ISBN13 9788960652989
ISBN10 8960652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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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도정
경북 울진 출생. 하동 쌍계사에서 원정스님을 은사로 출가, 양산 통도사에서 고산 큰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아 현재는 합천 용지암의 주지로 있으면서 쌍계사 율원에서 수행 정진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통해 ‘승려 시인’ 김도정이라는 이름으로 시를 나누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대한문학세계』에 시 〈뜨겁고 싶었네〉로 등단, 저서로 시집 〈누워서 피는 꽃〉〈정녕, 꿈이기에 사랑을 다 하였습니다〉가 있다. 현대불교문인협회 회원, 경남시인협회, 현대문예사조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김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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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할매랑 둘이 살지만 여러 명의 여자와 한집에 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자상하게 이것저것 챙겨주실 때는 어머니 같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앉은 채 주무시거나 몸이 아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주무실 때는 늙으신 할머니와 사는 것 같고, 이런저런 잔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 되면 기세등등한 마누라와 사는 것 같고, 기분이 좋아 조잘조잘 거리실 때는 딸을 키우는 것 같은 재미도 듭니다. 따뜻한 화목난로 옆에 앉아 함께 군고구마를 먹으며 김치를 찢어 내 입에 넣어줄 때는 영락없는 애인 사이가 됩니다. 할매도 내가 등 긁어줄 때는 영감 같고, 힘든 일을 척척 해줄 때는 든든한 아들 같고, 정겨운 애인 같고, 지독스레 말 안 듣는 말썽쟁이 손주 같을까요? --- ‘할매의 파마’

인터넷 신문에서 대통령의 불통에 대한 기사를 읽다가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할매와 함께 거실에 앉아 밥을 먹자니 할매가 한 말씀 하십니다.
“시님, 옛말에 눈 봉사 며느리는 쫓아내도 벙어리 며느리는 안 쫓아낸다고 합디다.”
“왜요?”
“눈 봉사는 밥만 축내고 일은 안 하니까 쫓아내는 게고, 벙어리는 불평도 없이 일을 잘하니까
안 쫓아내는 게지요.”
“그럼, 어떤 며느리가 벙어리처럼 말도 안 하고 봉사처럼 봐야 할 걸 못 보면 어쩝니까?”
“누가 그걸 처음부터 며느리로 앉혔대?”
“옳거니!” --- ‘입수구리’

내게는 오늘 장작 쌓은 일이 어쩌면 이별을 쌓는 연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을 사는 것도 어쩌면 이별을 쌓는 일인 것만 같습니다. 장작이 앞으로 쏟아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뒷벽 공간을 두고 장작을 쌓듯이, 할매와의 이별의 예감은 내 가슴에 허전한 공간을 만듭니다. 이런 생각들이 찬바람을 몰고 와 가슴 저 밑바닥을 갈퀴처럼 훑고 지나갑니다.
작년, 재작년, 그 이전에도 매년 나무를 하고 도끼질을 해서 처마 밑에 장작을 쌓아두었지만 오늘처럼 가지런하게 쌓지는 않았습니다. 비뚤어도 내가 갖다 때기 쉽도록 막 쌓아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장작을 차곡차곡 가지런하게 쌓아둡니다. 내가 아닌 할매나 그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갖다 때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할매가 갖다 때기에도 좋도록 잘게 쪼갰으니 나무 걱정은 무의식중에라도 덜고 싶었나 봅니다. --- ‘빈집’

'근심을 푸는 곳'. 아, 그 아름다운 의미가 담긴 곳으로 가는 것이 어느 누군들 싫겠는지요.
그곳으로 가서 적당히 치부를 드러내고, 다리를 벌리고 앉기만 하면 근심을 풀어낼 수 있다니!
‘해우소’가 비록 한자 언어지만 우리만의 말이고 보면, 우리말에서 어떤 명사가 한 생의 밑바닥에 은밀히 엉켜 있는 것까지 풀어지는 의미를 줄 수 있단 말인가요. 풀어도 풀어도 되엉키는 세상사도 아무 거칠 것 없을 것만 같은 편안한 뉘앙스를 줄 수 있단 말인가요.

힘겨운 숨을 고를 때,/능선과 능선 사이에서/산도 황금빛 달을 낳았다
밤안개가 산허리에 감긴다/별이 찡그리듯 가물거린다
내가 시원하거니와/하늘도 시원하다 --- ‘해우소 예찬’

집에서 짐을 챙겨 나오며 당부 했지만, 진작 잇몸 약을 사다드리지 못한 게 또 마음에 걸립니다. 할매는 마지막으로 매달리듯 나를 꼭 안아보십니다. 그러고는 안경을 벗고 눈물을 글썽입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 하자 할매는 부엌으로 난 쪽문에 반쯤 몸을 숨기며 새색시가 신랑 군대라도 보내는 심정으로 연신 눈물을 훔칩니다. 나는 차창을 열고 할매한테 힘차게 팔을 흔듭니다.
“할매, 자주 왔다 갔다 할 거니까, 밥 잘 챙겨 드시고 계세요. 알았지요!”
할매는 눈물을 훔치느라 말이 없습니다. 차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할매는 팔만 자꾸 흔듭니다.
--- ‘할매, 다녀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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