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나’를 만나시게 되길…
과거가 쌓여서 지금의 ‘나’가 된 건가요? 세월이 ‘나’를 구성한 건가요? 지금의 ‘나’로 살기 위해 예전의 ‘나’로 살았단 말입니까? 지금의 ‘나’는 다가올 어느 날을 위해 웃고 울고 있는 건가요?
아닐 겁니다. 어떤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어지는 연속성 안에서 인간의 마음은 안전하다고 느낀다지만 불행하게도, 불연속적인 ‘나’는 너무나 많습니다. 과거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고,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만으로도 세상은 놀랍도록 다채롭습니다. ‘나’는 어떤 것과도 다른 시간이, 뒤섞인, 소중한 존재입니다.
세월은 수평으로 쌓이지 않고 수직으로 서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뒤죽박죽. 시간은 기억과 맞닿자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오면 되는, 그러면 그 자체로 의미를 갖게 되는, 비로소 세월도 시간도 ‘나’에게 쓸모 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이어 붙이던 논리가 사라지자 모든 ‘나’가 지독히 평범한 것들과 함께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많은 ‘나’를 건져냈을 때, 마구 버려지던 것들이, 마구 잊었던 것들이, 낡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 것들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입니다. 오래된 사진첩의 젊은 어머니는 ‘나’를 낳기 위해 예비하고 있는 어머니가 아닙니다.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였고, 잠시 ‘나’는 그저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낡은 것, 지나간 것, 또 애매한 것을 사랑합니다. 그건 모든 ‘나’를 사랑하는 일일 겁니다. 손을 내밀어 무엇인가를 움켜쥐어봅니다. 고맙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머문 당신의 눈길이 고맙습니다 ---「프롤로그」중에서
숨바꼭질 前後
국가가 나를 키워주려 한다. 나는 (누가 나를 키워주기엔) 너무 많이 고독해보았다. 머리를 박박 깎고 교복을 입어보았다. 우편물 하나에서도 권력의 공포를 보았다. 아들이 어렵게 사춘기를 넘어섰는데 국가는 나를 어린애 취급하려 한다. 그런 취급이 익숙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러기엔 너무 오래 외로웠다.
저문 골목길의 단절은 어디 갔는가? 가끔 친구들은 술래를 두고 슬쩍 집으로 가버렸다. 또 가끔 너무 잘 숨은 나를 두고 술래는 찾기를 포기했다. 어둡고 배고프고 무서웠다. 나를 버리고 간 친구라니? 나를 찾아주지 않는 국가라니? 자주 세계와 단절된 골목길은, 그러나 스스로 어른이 되는 공간이었다.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기차에 홀로 남겨지곤 했다.
국가의 관리 하에서 키워질 때 추방은 두렵다. 자칫, 대한민국으로부터 유기(遺棄)되기 쉽다. 그러나 날은 저물어 고독하고 고독이 서로를 부른다. 술래가 나를 찾아 저녁으로 데려갈 때 그건 꼭 승리를 의미하지 않았다. 발견됨으로써 술래 또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오늘 우리는 서로를 구출해야 할 골목길에 다다랐다. --- pp.15-17
동네 목욕탕
늙은 아버지가 사우나, 찜질방엔 없고 목욕탕엔 있다. 타일은 늘 미끌거렸다. 물때 때문이었을까. 사람이라면 으레 풍기기 마련인 물비린내도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들이, 일주일 내내 험한 소리를 들은 아버지들이 귀를 씻고, 일주일 내내 발을 씻지 않은 어린 아들의 살을 벅벅 밀어주던 아버지들이, 때를 벗겨내는 만큼 계급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들이, 일요일 아침이면 목욕탕에 가득했다.
몸이 으스스하도록 겨울바람이 불면 김이 뽀얗게 서린 동네 목욕탕이 생각난다. 살이 벌게지도록 때를 밀어주시던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수건을 접어서 이태리타월에 집어넣는 방법을, 나는 지금 아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명절 앞이면 아들을 데리고 되도록이면 작은 목욕탕을 찾는다. 온탕에 몸을 담그면 아랫도리부터 뜨끈뜨끈하게 아버지 생각이 올라온다. 그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아들에게 바나나우유를 권한다. (아버지는 삼강사와를 사주셨다. 왜 삼강사와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걸 마시는 재미로 온탕의 고통을 참았을 것이다.)
옷을 벗는 일은 간혹 세월을 확인하는 일이다. 벗은 몸뚱아리를 보는 일은 매번 세월을 확인하는 일이다. 구석구석 때를 밀다가 사타구니에 자란 흰털을 발견하는 일은 세월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이다. 발뒤꿈치나 팔꿈치를 사랑하게 되려면 때를 밀어보아야 한다. 아들의 등을 밀어주다가 문득 “어깨가 믿음직하다”고 느껴보려거든 사우나 말고 동네 목욕탕의 키 낮은 의자에 앉아보아야 한다 --- pp.53-55
파카45
(스승은 인생의 길에 등불을 밝혀준다.) 시인은 자기 삶에 당당했다. 작은 몸 어디에서 삶에 대한 확신 같은 것이 솟아 있었다. 갓 입학한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시인을 보았다. 그분에게 매료되어 백일장에 나가게 되었고 또래들 보다 늦게 문예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문예부에 들기 전까지 내가 읽은 제대로 된 문학은 단 한 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외설서적인줄 알고 이불 속에서 읽었다)이었다. 문예부에 들어서야 카프카니 사르트르니 하는 이름을 들었다. 문학의 세례는 그렇게 느닷없이 왔다.
(글씨는 때로 그 자체로 시가 된다.) 그러나 정작 나를 문학에 빠져들게 한 건 글씨였다. 최돈선 선생님, 준 형, 이미 졸업한 권혁소 형의 글씨였다. 밤새 그 글씨들을 흉내 내 시를 썼다. 글씨가 문장을 배열했고 단어들을 비로소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었다. 심지어 향 기를 풍기기까지 했다. 시를 위한 글씨가 아니라 글씨를 위한 시처럼 생각되었다. 모나미볼펜이나 연필로는 잘 안되었다. 만년필이 갖고 싶어 끙끙 앓았다.
국민학교 5학년 때 글씨를 못 쓴다고 아버지에게 호되게 혼났다. 아버지는 그게 미안하셨던지 다음 날 나를 데리고 서예학원에 갔다. 연탄난로 하나가 놓인 작은 학원에서 그로부터 3년간 붓글씨를 썼다. 화선지 위에 정형화된 글씨를 썼다. 그러나 스승과 형들의 글씨는 나를 해방시켜주는 듯했다.
조양동 3통 통장이던 아버지는 한 달에 삼천 원 정도의 활동비를 받았는데 그걸 모아 사주신 게 ‘파카45’였다. 한 만 원쯤 했던 거 같다. 당시로선 거금이었고 내가 가진 최초의 명품이었다. 잉크를 채우는 동안 언어들이 줄지어 만년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때로는 의외의 것이 소년을 해방시킨다. 스승의 글씨를 그럴싸하게 흉내 낼수록 제도교육은 소년을 붙잡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내 글씨도 자유에 가까워졌고 급기야 지방지 신춘문예로 시인이 되었다. 한 명의 시인으로 취급해주신 스승은 시상식 날 나를 방석집에 데려갔고 젓가락을 두드리셨다.
자기 삶의 확신은 고독의 시간과 비례한다. 문학의 시간은 (그것을 쓰던 읽던 간에) 스스로를 유배하는 시간이고 그 시간의 양만큼 삶은 단단해진다. 바람이 불면 파카45에 다시 잉크를 채워봐야겠다. 억압이 되풀이되니 중년의 삶은 고단하다. --- pp.102-104
비둘기호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 기차는 따뜻했다. 기름 냄새에 지쳐 멀미를 하면서도 기차가 데려다줄 그 세계를 동경했다. 기차는 간이역에 서서 후회와 걱정을 안겼다가는 다시 용기의 세계로 출발했다.
중3 겨울, 춘천역에서 청량리행 상행선 비둘기호 첫차를 탔다. 눈이 내렸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움직인, 소년의 첫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둔촌동, 주소만 적힌 쪽지는 소년의 짝사랑으로 꼭꼭 접혀 있었다. 기차는 결코 뒤로 가지 않았다.
미대 졸업반에 교생으로 오신 선생님은 밝았다. 풋풋했고 아름다웠다. 몇 채 뿐인 둔촌동 아파트에서 선생님은 반팔 옷을 입고 계셨다. 소년은 한겨울에 반팔 옷을 입고 있는 걸 처음 봤다. 새벽 비둘기호의 한기가 아직 그 충격적인 기억을 꽁꽁 얼려놓고 있다.
비둘기호는 믿음으로 움직였다. 국가에 대한 서민들의 믿음, 역에 걸린 시간표에 대한 믿음, 낯선 간이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누이들과 누이들의 꿈에 대한 믿음, 분명한 이동과 익숙한 곳으로의 귀환에 대한 믿음.
디젤유에는 애환도 섞였는데 가출과 가난한 상경과 귀향의 실현 가능성, 낭만과 교제를 포기한 통학생들의 고독, 서민의 냄새와 소란함을 함께 실어 나르던 기찻길 같은.
비둘기호는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했던, 가난한 자들의 정표였다. --- pp.106-109
스무 살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대로 스무 살이거나 고의로 성장을 멈춘 이들이 있다. 스스로 짐작하였을 터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곧 발전을 의미하진 않는다. 순수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 순간에 자신을 남겨놓음으로써 먼 훗날 친구들이 자신을 기억하게 하려 했음이다. 그들 중 몇을 기억한다. 박래전, 조성만, 박성희….
순수를 ‘진보’라 하진 않는다. ‘진보’는 허구적 단어다. ‘진보’는 그 자체로 행동을 의미하진 않는다. ‘진보’가 ‘거룩한 하나님’처럼 종교적 언어가 된 거 같다. 어떤 행동을 ‘진보’라 불러야 맞다. ‘진보’를 규정하고 나서 어떤 행동을 그 잣대에 맞추는 순간 ‘진보’는 답답하고 냉소적 단어가 된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짓는다. 새로운 행동에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져야 옳다. 1909년 지문등록 거부서약을 받아낸 간디는 “사티 아그라하”, 즉 “진리의 힘”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그의 사촌은 “사다 그라하”, 즉 “선의를 위한 굳은 의지”를 제안했다. 행동은 단 한 가지, 집요하게 거부하되 폭력 없이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힌두교도였던 간디는 자이나교에서 비폭력의 개념을 빌려 왔다. 간디는 자신의 행동을 ‘진보’라 하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과 ‘유물변증법’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월호의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지 ‘진보 행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통일’을 한다는 건, 남과 북이 꼭 하나가 되는 것일까. 그게 ‘진보’일까. ‘통일’은 꼭 하나가 되자는 게 아닐 수 있다, ‘통일’은 더 다양해지는 것일 수 있다, ‘통일’은 그 자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즐거운 행위일 수 있다. 분단이 가져온 부조리는 고전적 방법의 ‘통일’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다. ‘통일’의 개념이 변화할 수 있다면 관념적 ‘진보’라는 틀에서 ‘자주, 민주, 통일’을 해방시켜야 한다.
스무 살에 나는 왜 행동했을까. ‘진보’운동을 하려 했을까. 아니다, 그건 잘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부조리에 저항하고자 했고 ‘광주’의 진실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길 바랐다. 지금 나는 여전히 스무 살 순수를 기억하는 몇 사람을 알고 있다. ‘진보’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를 위해 살고 있다. 그들이 있어서 폭염이 계속되는 이 여름날에도 나는 서늘한 바람을 만난다. --- pp.197-199
편지
편지지를 사는 버릇은 사춘기의 흔적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마음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에서 오른쪽 어깨를 거쳐 손끝까지 가 꼬무락거린다. 가끔 오른손 검지 끝이 간지럽다면 그리운 이가 생겼음이 틀림없다.
퇴근길에 줄이 없는(반드시 줄이 없어야 한다) 편지지를 사고 1.0밀리미터가 넘는 굵은 펜(얼른 손끝의 것들을 빼내기엔 굵을수록 좋다)을 사자. 물론 편지를 쓰지 않아도 손끝이 곪는 일은 없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마음이 곪아 터진다.
글씨는 곧 마음이다. 마음을 최대한 연장시킨 그 끝이 글씨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다. 마음이 신경세포를 타고 손끝으로 간다. 손끝의 근육과 살, 뼈가 협동하여 펜을 잡고 펜 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에만 글씨는 현현(顯現)한다.
경험하셨을 터, 마음을 표현하려 애쓴다고 편지에 마음이 온전히 담기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개성이 담긴 글씨를 쓰려고 노력해보라. 신기하게도, 그렇게 표현이 어렵던 그리움의 언어가 남겨진다. 편지 쓴 날, 그 편지 끝 4월 1일, 숫자에도 사랑이 담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우체통까지 가는 길은 그리움 가까이로 가는 일이다. 가령, 길가에 흔한 플라타너스 가지에 버짐 자욱이 보였다면 당신은 다시 태어난 것이다. 편지를 잃지 않았는지 속주머니를 몇 번 확인했다면 그거야 뻔하다.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우표를 사 봉투에 붙일 때(반드시 우표를 혀에 대고 침을 묻혀야 한다. 풀을 바르는 행위는 불경하다.) 오른 손 엄지의 압력은 그리움의 크기다.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돌아서 가다가 다시 뒤돌아보라. 가슴이 먹먹한 건 거기 마음을 두고 왔기 때문이다. 마음이 답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시간이 어른이 되어 가는 시간이다. 물론 그리움의 흔적은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 pp.209-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