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그는 유교사회의 윤리도덕과 천주교의 진리 사이에서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럴 듯한 가공을 해서라도 그가 겪었을 한 순간의 호흡이나마 놓치지 않고 제대로 담아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관점에 충실하려고 한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소설적 기법이나 소설적 형상화의 수단을 동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선택한 삶을 조금이나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사회 상황과 인물이 처했던 조건들을 되살려보려 한다. 그래서 이 글이 교회사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중세사회 해체기에 목숨을 걸고 진리의 길을 가고자 몸부림쳤던 진주지역 한 인물의 삶을 복원하는 하나의 보기가 되기를 바란다. _12쪽
1장 새로운 역사의 시작
조선에 싹을 틔운 새 사상
1866년(고종 3)에는 과거 어느 박해와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입힌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당시 집권자인 대원군은 초기에 천주교를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러시아의 남침 야욕을 막기 위해 주교 베르뇌S. F. Berneux에게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대원군이 태도를 바꾼 것은 1860년(철종 11)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한 사건에 이어 서양인들이 학살된 사실이 조선에 전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박해는 대원군이 실각하기까지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고, 1871년까지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후 외국 함선의 내침에 뒤따르는 거듭되는 박해에 시달리던 천주교 신자들은 1886년에 조선이 프랑스와 국교를 맺으면서 가까스로 신앙생활의 자유를 얻었다. _29~30쪽
경남지역에 전해진 천주교
대체로 동부 경남지역은 언양?양산을 거쳐 동래로, 낙동강을 따라 밀양?김해로 천주교 전파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서부 경남지역은 전라도 남원과 장수에서 함양·안의를 거쳐 서부 경남 곳곳에 천주교도의 피난처로서 신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경남 동부의 천주교 신앙 전파가 서부보다 빠른 편이었지만, 1830년대에 이르면 경남지역 여러 곳에 두루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셈이다. _42쪽
2장 증언 사료로 본 순교복자
순교자에서 순교복자로
시복에서 순교자 정찬문 안토니오와 함께 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출신의 구한선 타대오,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출신의 신석복 마르코, 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출신의 박대식 빅토리노, 거제시 옥포 출신의 윤봉문 요셉도 나란히 순교복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특히 8월 16일 시복식은 교황이 직접 이 땅을 찾아와 집전한 것이어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_46쪽
순교자의 기록
… 모든 의문의 단서는 그의 신분이 지역에서 확실하지 않았던 것과 관련 있지 않을까? 또는 마을과 문중에서 그의 기억조차 꺼릴 정도로 천주교 신앙이 터부시되었던 탓이지 않을까? 현재까지 알려진 정찬문의 이야기는 사실상 앞의 증언 내용 가운데 ①[《치명일기》]의 사실을 기본 줄거리로 하고, ②[《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와 ③[《병인치명사적》]의 증언이 더해져서 오늘날 교회사로 정리된 것이다. _62쪽
3장 정찬문은 누구인가
절의를 지켜온 집안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정찬문은 진양 정씨로 우곡 정온의 후손이다. 《진양정씨우곡파세보》를 보면 정찬문의 가계는 진양 정씨 중에서도 우곡공파에 속한다. 정온이 그의 파시조이다. 우곡공파는 정온의 호를 따른 것이고, 인물의 호는 대체로 지명에 유래한 경우가 흔하니, 정온도 그랬을 것이다. _67쪽
우곡 정온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진주지역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정온 이후에는 이 문중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조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정찬문이 속한 문중이 더이상 분파하지 않고 지금껏 진양 정씨 우곡공파로 존재하는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그의 사회적 지위는 향반(향촌에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양반)에 머물렀을 것으로 보아야 옳겠다. _69~70쪽
신분과 태어난 마을
우곡마을은 정온 이래로 그의 후손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곳이다. 그렇지만 정찬문은 우곡마을 입구에서 보면 들 건너 남서쪽 산의 남쪽 언덕배기에 위치한 중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정찬문의 삶에서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앞의 가계 조사에서 보았듯이, 정찬문이 정온의 후손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신분을 섣불리 결론지을 수는 없다. 주지하다시피 정온은 고려의 유신이었다. 그로부터 따지면 정찬문은 450여 년이 훨씬 지난 19세기 중엽의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신분을 추정하려면 그 사이에 일어난 사회 변동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에는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문중 구성원 간의 경제력 격차가 상당히 커졌고, 이에 따라 문중 내에서조차 차별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19세기 중엽 중촌마을과 우곡마을은 모두 상사면에 속했지만 사회·경제적 기반이 달랐을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_79쪽
4장 순교를 둘러싼 진실
믿음의 계기
조선시대에는 같은 신분 내의 혼인이 일반적인 풍습이었으며, 특히 지역 사족의 경우 더욱 엄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 비춰보면 정찬문의 혼인 대상은 동일한 신분 지위에 있던 진주지역 향반의 딸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왜 굳이 그는 타지의 천주교 집안에서 아내를 얻었던 것인가? _97쪽
정찬문이 천주교를 처음으로 접했던 곳은 소촌으로 짐작된다. 19세기 중엽 소촌은 시장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었다. … 더구나 소촌은 경남 서부지역 교통의 요지여서 어느 장시보다도 더 많은 보부상이 소촌장을 드나들었다. 그런 만큼 소촌장은 다양한 정보들로 넘쳐났으니 그 가운데 천주교 소식도 포함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정찬문은 결혼하기 전에 이미 이웃 소촌장을 드나들면서 천주교 소식을 접했을 것이고, 나아가 피난 교인과 교류를 통해 마침내 입교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구한선 타대오의 친가와 외가의 관계에 비추어서도 추정할 수 있다. _100~101쪽
순교와 순교지의 진실
이 책을 쓰면서 [진주성도]들을 다시 살피고, 무엇보다도 진주진영의 관청을 꼼꼼히 살피면서 군뢰청(軍牢廳, 죄인을 다스리는 군영[진영] 소속 병졸들이 근무하는 관아)에 바로 붙어 있는 ‘옥’을 발견하고 앞의 견해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토포청과 군뢰청이 있는 진영 안의 옥을 두고 멀리 떨어진 주옥에다 죄인을 가두었을 까닭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교복자들은 바로 진주진영 군뢰청 옥에 갇혀서 천국의 길을 닦았으리라 믿어도 좋을 듯하다. _115쪽
5장 순교복자 정찬문과 진주지역
진주지역의 근대화와 천주교
흔히 진주지역이 보수적이어서 천주교의 전파가 늦었던 것으로 보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까? 진주 동면 향촌사회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더 넓은 맥락에서 보면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19세기 진주지역은 보수적인 사상의 추이 속에서도 역동적인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진주지역이 갖는 역사성을 말한다. _124쪽
순교복자 정찬문의 상징화
새로운 신앙의 전파는 해당 사회의 신·구질서의 혼돈 속에서 새 세상에 대한 갈망과 무관하지 않게 이루어진다. 이것은 진주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진주지역에 새로운 신앙이 뿌리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조선 후기 진주는 경상우도 군정과 행정의 중심지였기에 국가질서의 규정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사회 해체기에 나타나는 현실의 척박함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이는 신앙의 형태로 나타난 새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정찬문 순교자의 삶이 용납되지 않은 것이나 우곡공소와 문중 사이의 갈등도 삶의 방식이 다름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 _131쪽
6장 순교자의 증거인 경남의 천주교 발전
모든 역사 연구는 시대와 지역의 특성을 배려하면서 구체적 주제의 제시가 요구된다고 한다. 경남지역 천주교 변천사를 말한다면 한국 천주교회사라는 보편적 범위 속에서 경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인물의 삶이든 어떤 사건이든 그것을 낳은 배경이 존재한다. 순교자의 삶 또한 천주교회의 역사나 지역의 특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_137쪽
나가는 말
정찬문 안토니오의 삶은 현재로서 더이상 추적할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그의 죽음만이 증언록에 담겨서 전할 뿐이다. 정찬문 안토니오의 순교 사실은 전하는 바에 따라 다르게 서술되고 있다. 그의 순교를 증언해주는 자료조차 모순된 점이 없지 않다. 이것은 순교의 진실을 서로 다른 마음으로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다. 교회의 증언 자료와 무두묘의 진실을 아울러 고려한다면, 그는 애초 곤장으로 매를 맞아 순교했으며, 그 주검이 효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찬문 안토니오의 순교가 참형으로 전설화되었던 것도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다. _169쪽
정찬문 안토니오는 마지막 날에도 혼자였다. 그가 순교하는 날 아무도 그를 몰랐고, 어느 누구도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하느님을 버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남겼는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가톨릭 진리의 증거만을 남겼다. 그리고 2014년 8월 16일, 순교자 정찬문 안토니오는 복자품에 올림을 받았다. _170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