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콥 탈몬(J. L. Talmon)은 자신이 저술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기원」(Origins of Totalitarian Democracy, 1952)에서 프랑스혁명이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전조인 동시에 근대 전체주의적 파시즘의 전조라고 묘사했다. 그는 프랑스혁명에서 형성된 ‘변화무쌍’하고 ‘선동적’인 정치사상들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적 파시즘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생성되었으며, 이런 흐름은 당시 사상가들이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즉, 링컨과 마르크스, 루즈벨트와 무솔리니처럼 서로 다른 인물들이 모두 프랑스혁명의 주요 교훈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칼뱅주의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 이 개신교 운동은 먼저 프랑스의 신학자이며 법학자인 장 칼뱅(1509-1564)의 지도 아래 제네바에서 생성되었고, 이후 250년 동안 프랑스·스코틀랜드·네덜란드·독일·영국·북미의 많은 지역을 휩쓸었다. 칼뱅의 본래 정치사상 역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등 상반된 두 성향에 널리 영감을 줄 만큼 충분히 ‘변화무쌍’하고 ‘선동적’이었다. 많은 주요 칼뱅주의자들에게 전체주의적 성향을 읽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칼뱅 자신은 물론 테오도르 베자,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새뮤얼 러더퍼드(Samuel Rutherford), 존 윈스럽, 코튼 매더(Cotton Mather), 그리고 이들의 많은 후계자들에게서 이런 성향을 볼 수 있다. 종교적 신조로 인해 칼뱅주의자들에게 비판, 금지, 감금, 고문, 추방 등을 당하거나 심지어 처형까지 당한 피해자들을 나열하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장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장 모렐리(Jean Morely), 야콥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휴고 그로티우스(Hugo de Groot), 리처드 오버튼(Richard Overton), 존 릴번(John Lilburne),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앤 허친슨(Anne Hutchinson)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근대 초기 유럽과 북미에서 군주제, 노예제도, 남성우월주의, 인종차별주의, 편협주의, 엘리트주의, 탄압 등 각종 부끄러운 형태의 정념과 불공정을 열심히 옹호했던 칼뱅주의 글이나 설교문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법, 종 교, 인권에 대한 칼뱅주의 전통을 정직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사실들을 인정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이런 어두운 면을 인정하면서 칼뱅주의의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칼뱅과 그의 신봉자들이 어떻게 인권에 대한 그들만의 독특한 신학과 법학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또 어떻게 이런 권리에 대한 가르침을 근대 초기의 유럽과 미국에서 영구적인 제도적·헌법적 형태로 만들어 냈는지 보여 줄 것이다. 근대 초기 칼뱅주의자들에게 첫 번째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권리는 종교의 권리였으며, 이 권리는 신자 개개인이 누릴 수 있는 양심의 자유(liberty of conscience)와 종교행위의 자유(free exercise of religion), 그리고 종교단체가 누릴 수 있는 예배의 자유(freedom of worship)와 자율통치(autonomy of governance)를 가리킨다. 특히 칼뱅 시대의 개혁가들은 사회에서 종교적 소수자로 탄압과 박해를 받았으며, 따라서 자신들의 종교의 권리를 정당하게 보호받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다른 권리들도 함께 보호받아야 함을 이미 알고 있었다. 개개인이 양심과 종교행위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집회, 표현, 예배, 전도, 교육, 자녀 양육, 여행 등 신앙의 기초가 되는 모든 것에 대한 권리의 보호가 필요했고, 교회 정치의 일환으로서 종교단체가 예배와 자치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법인설립, 공동재산, 집단 예배, 조직적 구제사업, 종교교육, 출판의 자유, 계약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에 대한 권리의 보호가 필요했다. 따라서 근대 초기 칼뱅주의자들에게 종교의 권리는, 게오르크 옐리네크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많은 인권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또한 종교의 권리는 많은 근대 초기 헌법들의 ‘산파’ 역할도 했다. 칼뱅주의자들은 종교 권리와 그외 인권들에 대한 뜻과 기준을 제공하는 헌법 구조와 절차가 없이는 이런 권리들이 사회에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음을 힘든 경험을 통해 알았다. 기본적인 보호, 구조, 피난처에 대한 권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인권이 별다른 의미를 줄 수 없다. 또 권리를 남용하는 정치관료들과 타 시민들에 대해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인 법정에서의 원고적격의 권리를 가지지 못하거나, 적절한 법적 보상을 구하기 위한 수단인 소송의 절차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 이들 역시 인권과 적절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 나아가 권리의 침해에 대해 부끄러움과 후회, 제재와 존중의 근원을 제시하는 정신과 도덕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별다른 인권의 타당성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근대 초기 칼뱅주의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이들과 함께 법의 지배와 모든 평화적인 신자들의 기본권 및 자유의 보호에 주안점을 둔 인권 문화와 헌법 구조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서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