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주의란, 하나님은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기분좋게 시간을 보내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원하신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은사주의자들은 그런 냉혹한 평가를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은사회복운동의 설교외 강연을 통해 청중들이 으레 느낄 수 있는 행복감에다가 이 운동의 치유신학을 함께 고려할 때, 행복주의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무디 이래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복음 증거에서 나타난 '난 이제 매일 행복하고,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은사주의자들은 구 오순절 운동이 외쳤던 치유에 대한 강조-오순절운동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북미의 '성결' 계통에서는 뚜렷이 드러나던 강조-를 이어받아, 육체의 질병과 불편함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원래 품으신 선한 뜻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한다. 이를 기초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치유하신 일을 그들 주장의 근거로 삼고(마 8:16,17; 벧전 2:24) 이사야 53장 3절부터 6절 그리고 10절을 근거로, 대속에는 치유가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또 그들은 바울이 언급한 '치유의 카리스마타'(고전 12:28. AV는 '병 고치는 은사'로, RSV는 '치료자들'로 되어 있다)라는 말을 가리키면서 지속적으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치유하심(증언에 따르면, 여기에는 다리를 길게 하거나 척추를 곧게 하는 일, 그리고 남미에서는 치아를 채워 넣는 일도 포함된다)을 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신유의 은사를 기대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본문들만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억지 같다. 신약성경은 질병을 치유받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어떤 신자들에게는 질병이 하나님의 듯일 수도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행복에 대한 은사주의의 가정은,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이나 치유받지 못하는 연단을 통해서 지혜와 인내를 배우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과 같은 유익을 얻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은사주의의 가설에 근거해 치유를 구하여 얻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치유하기를 원하지 않았거나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믿음이 없어서 치유받지 못했다는 말을 듣게 될 때, 어떤 고뇌를 겪을지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초자연적으로 치유하실 수 있으며 또 종종 그렇게 하고 계시다. 나는 하나님께서 일부 사람들의 사역을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치유를 하시기도 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사주의자들이 이처럼 행복주의의 경향을 보이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며,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역행한다고 판단하다.
--- pp 266~267
은사주의는 어떤 특정한 체험 자체를 얻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하면 아무 꺼리낌없는 철저한 온전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그분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을까에 집중한다. 예배에서 온전함은 모든 예배자가 빠짐없이 참여하고 하나님께 최대한 열린 자세를 가진다는 뜻이다. 사역에서 온전함은 표적 은사를 행하는 일뿐 아니라 섬길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분별하고 활용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표현을 하거나 하나님과 교제할 때 온전함은, 곡조가 있는 찬양과 성령 안에서의 찬양을 많이 드리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손뼉 치고 팔 들고 손을 뻗고 합심해서 통성기도하고, 공동체에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을 전달하고, 방언 사용자에게서 통역자에게로 주도권이 오가고, 설교자가 틀에 매이지 않고 즉석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회중이 여기에 감탄사와 대답을 하며, 성도들이 서로 포옹하고 기쁨에 겨워 춤추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도간에 나누는 교제에서 온전함은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모모할 정도로 관대하게 내어 주는 일을 뜻한다. 은사주의가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런 식으로 온전함을 추구하는 데에 기꺼이 동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온전함은 이전에 교회 내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열성 없는 신중한 상태로 묶어 두기 바빴던 절제와 체면이라는 얼빠진 이상에 대한 유익한 도전이다. 이러한 도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운동의 일부분이 유치하고 우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은사주의의 정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냉담한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직면해야 한다. 당신은 교회 안에서 교제를 통해 주님 앞에서 은사주의자들과 같은 온전함을 실현시키기 위해 어떤 제안을 할 생각인가? 당신은, 예를 들어 그토록 많은 주일에 수많은 교인의 예배 식단이 된 활기차고 틀에 박힌 그러면서도 적당한 속도로 진행되는 60분짜리 예배, 이른바 목회자와 성가대가 수동적인 회중을 상대로 하는 공연을 어떻게 보는가? 분명 이러한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러한 예배를 어떻게 온전한 예배로 바꿀 작정인가?
또한 회중 가운데 은사 받은 사람들의 재능이 묻혀 있고 개인 사역과 지역사회 사역에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지지 않는 이유는, 목사가 원맨쇼를 고집하고 자기 교인들을 사역 동역자로 생각하지 않고 교인들 중에 자신보다 일을 더 잘하는 듯이 보이는 교인이라도 있을까봐 겁 먹고 도망치기 때문이라는 불평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당신은 그러한 불평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목회자들이 맡은 일을 하도록 이미 돈을 지불했기 때문에 교인석에 앉은 사람들이 영적 사역에 참여하기를 꺼린다는 불평에 대해서는 또 어떠한가? 평신도의 수동적인 태도는 온전한 사역이 아니라 전교인 사역에 대한 생각을 파괴적인 방식으로 부젖ㅇ한다. 그 다음 당신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함께 이루는 충만한 사역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또한 그토록 많은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얼어붙은 백성'이라는비아냥거림이 붙게 했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르는 찬양, 냉담한 형식주의, 폐쇄적인 삶, 상호헌신의 부족을 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은사주의에서 이런 문제 전반을 다루는 방식에 별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당신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직면하지 않은 채 은사주의의 관행을 감히 비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세기 전 무디가 자신의 복음 증거 방식을 공론하는 비판가에게 던진 통렬한 반박을 받아 마땅하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선생님처럼 전도를 안하는 것보다는 저같은 방식으로라도 전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은사주의운동은 하나님이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알고 있는 사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온전함을 추구하도록 교회 전체를 선동하기 위해 보낸 자극제이다. 도전을 직면하라!
--- pp 327~329
성령께서 개개인의 삶에서 행하신 일을 좀 안다고 해서, 성령 그 분에 대해 모두 다 알고 있는 양 자신하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머리로 먼저 알고 난 후 영적인 체험은 나중에 할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체험을 먼저 한 후에 이론적으로 이해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정확한 개념의 필요성을 강조한 나머지 종종 이 점을 간과해 왔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제자들이 했던 경험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제자들이 받아들였던 영적인 진리들은 오류 투성이었으며, 그들은 너무도 자주 예수님을 오해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들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 그들의 삶을 만지시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신뢰했으며, 예수님께 배우기를 원했고, 또한 자신들이 배운대로 예수님께 순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열두 사도 가운데 열한 명은 깨끗함을 받았고(그들은 죄를 용서받았고 심령이 새롭게 되었다, 요 15:3), 그들과 더불어 다른 제자들도 '죄 용서'와 '평화'라는 예수님의 선물을 받았다.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의 교리를 그들 중 아무도 미처 이해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님의 선물을 받고 그들의 삶이 변화된 것이 먼저였고, 나중에 가서야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던 것이다.
(...) 그 다음의 과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실제로 하신 일을 성경에 비추어이해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각기 다른 기질과 상황을 고려하여 그 나름의 특유한 필요에 따라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과, 성령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하실 일을 선언한 성경의 보편적인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성경에 비추어 이해하는 일도 같은 과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이 당면한 과제이기도 하다.
--- pp 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