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침례 운동 또는 세례 운동이다. 예수가 요한 세례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훗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집전할 뿐 아니라 할례 대신 이 세례를 새로운 계약의 하느님의 백성에 가입시키는 입교 의식으로 삼게 된다. 예수와 요한 세례자를 이어 주는 유대는 이렇게 당연한 것으로 요청된다. 예수의 활동은 요한 세례자의 발자취를 따라 전개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바오로 사도가 요한 세례자에 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오로의 친서들에서는 하지 않는다. 복음사가들은 요한 세례자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는데, 그와 그의 활동을 예수에게 종속시켜 소개하려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가 침례 운동을 했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지만,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가 “유다 땅으로 가시어 …… 세례를 주셨다.”(요한 3,22)라고 말한다. 거기서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복음사가는 곧이어 이 말의 내용을 좀 더 자상하게 밝혀 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요한 4,1) 그리고 그다음 절에서는 여기에 쐐기를 박는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이다.”(요한 4,2) 이와 같이 원시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요한 세례자와 예수를 밀접하게 연결하면서도 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간격을 분명하게 역설하고 있다. 역사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간격을 제대로 측정하는 일이다.
- ‘제3장 예수와 침례 운동’ 중에서
앞 장에서는 침례 운동의 특성을 강조하였다. 요한 세례자의 동작은 단순한 세정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강조하다 보니 다른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았다. 실상 독자에 따라서는, 기원후 1세기의 유다교는 외적인 의식을 지키는 데만 골몰하던, 이를테면 그 수준이 저속한 형식주의적 종교에 머물러 있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당대의 유다교 실정과는 거리가 멀다. 성전과 율법에 대한 예수의 독창적인 태도와 입장을 돋보이게 하기 이전에, 이에 못지않게 예수가 얼마나 친바리사이계 율법 학자들과 가까웠는지를 말해 둘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짧게 다루어도 좋을 것이다. 예수의 이른바 친바리사이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이미 많은 연구가 있었고 그 결과 이제는 정설로 내세울 만한 견해 일치에 이르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바로 여러 가지 점에서 바리사이들과 가까운 율법 학자였기 때문에 성전과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생소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유다교계와 그리스도교계의 상당수 전문가들은 예수와 유다교 전통 사이에 맞닿는 점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는 당연한 결론이요, 이 유다교 전승의 일부는 옛 바리사이즘의 유산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어서 많은 연구가들은 표현에서나 사상에서나 한편으로는 복음서와, 다른 편으로는 구약과 신약 중간 시대에 햇빛을 보게 된 몇몇 문학 작품들과 타르굼 및 율법 학자들의 문헌 사이에 새로운 유사점들을 계속 발굴해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예수가 뿌리내리고 있던 토양은 어디까지나 기원후 1세기의 팔레스티나다. 그런데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 토양이 이른바 헬라계의 영지주의의 이름 없는 한 유파였다고 주장하던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라는 한 예언자적 인물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의 혼탁하고 잡다한 유다교의 틀 안에 끼어 맞추려고 지나치게 부심하다 보면, 오히려 그 차이들을 가리고 예수를 이름도 분명치 않은 어느 ‘카리스마적’ 율법 학자의 수준으로 격하시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 예수의 공생활에 뒤이어 온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종교 운동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위험도 없지 않다. 그리스도교든 유다교든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는 신학이 개중에는 없지도 않은 것 같다. 게다가 이런 근본주의 유형에 속하는 신학은 예수를 당대 유다교에 무리하게 끼어 맞춰 놓은 다음 거기에 너무 쉽게 역사라는 상표를 붙이려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순진함은 자칫 예수의 유다교 친근성을 연구하는 중대한 작업을 중단시킬 수도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 ‘제4장 예수, 성전 그리고 율법’ 중에서
복음서들을 제외하면, 신약 성경은 예수를 가리켜 예언자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예언자라는 칭호는 바삿로 계통의 교회들의 신앙 고백에도 끼지 못했으며, 공동체가 드리는 기도문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언자라는 칭호를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요한 사도 계통의 집단들, 특히 유다계 그리스도교의 몇몇 분파들, 특히 일명 클레멘스의 작품으로 대변되는 분파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사실 이 마지막 문헌에서는 예수가 ‘참된 예언자’라는 것을 매우 본질적인 칭호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언뜻 살펴본 자료 실태에서도 우리는 예수의 예언자 칭호와 관련하여 전승들 간의 일차적인 차이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차이는 요한 세례자와 관련시켜 보아도 그대로 연장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명 클레멘스의 작품에 따르면, 예수는 참된 예언자인데 이와는 정반대로 요한이야말로 그의 선임자인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거짓 예언자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꽤 후대에 속하는 어느 시기까지 몇몇 일부 교회에서는 그리스도론을 구상하고 명시화할 때, 비그리스도교 계통의 침례 운동과 맞서 벌이던 논쟁이라는 맥락에서 이를 추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반발의 출발점을 우리는 바로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제5장 예언자 예수’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파스카 사건에 입각하여 구성된 복음서의 증언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예수를 침례자, 예언자, 악마 추방자 그리고 이적 행위자로서의 그의 활동에 비추어 역사적으로 파악해 보려 했다. 여기에 사용된 방법과 절차 때문에도 우리는 예수라는 인물을 심리적으로 이해해 볼 기회도 없었고, 때에 따라서는 개개의 사건들을 그 나름대로의 특성에 따라 파악해 볼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가령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우리의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이런 말씀은 과연 예수가 몸소 발설하였는가? 저런 기적은 과연 전해 오는 이야기대로 사실상 일어났는가? 이런 질문들은 통시적 방법을 사용하는 문헌 비판에서 가장 고도의 ‘문학적’인 신임을 부여하는 예수의 말씀들과 동작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제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현재 성경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심한 질문 중의 하나인 ‘사람의 아들’의 문제를 다루려 들 때 우리는 정말 헤쳐 나올 길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쫓겨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예수는 참으로 자기 당대 사람들에게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제시하였는지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에서 예수가 정확하게 무엇을 알아들었는지를 파악하려 들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예수의 자의식이라고 하는 금지 구역으로 침범해 들어온 것은 아닌가? 예수는 과연 이 신비스러운 낱말에다가 무슨 의미를 부여하였을까? 이런 식으로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타당한 것이 될 수 없다면 결국 우리는 이 사람의 아들 문제에서 역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일련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지금까지의 장들에서 밟아 온 노선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출발점은 파스카 이후의 공동체들이다. 필자는 이들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예수를 회상하는 동안 그분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겨냥하려 했는지를 살펴 나갈 것이다. ‘그리스도’라든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 공동체들의 신앙 고백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는 너무 다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이상한 표현을 무슨 이유로 넘겨받게 되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 ‘제7장 사람의 아들’ 중에서
필자는 이 연구를 마치기 전에 교회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쓴다는 것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다소나마 이 자리에 밝혀 두고 싶다. 물론 우리는 예수와 역사에 관한 이제까지의 우리의 담론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길게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아직도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도 있다. 실상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점들도 좀 더 착실하게 발전시키고 때로는 수정도 하고 신축성 있게 조정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가의 처지에서 과거를 재진술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는, 다른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어디까지나 가설의 언어다.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찾아 나서서 그 시야를 언제나 좀 더 포괄적으로 넓히다 보면 역사가의 진술은 끊임없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특히 신약 성경의 주석자로 말하면 역사를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욱 쉬울 것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이미 이 책의 첫 장에서 밝힌 바 있다. 거기에 이어 온 다른 장들은 예수에 관해서 역사적으로 책임 있게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 잘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예수를 역사적으로 알아보려는 우리의 기도|씠?여전히 가능하다. 다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 있는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이 한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다. 곧 ‘나조라’ 사람 예수의 엇갈리는 여러 가지 모습들은 역사가의 손에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경우 그에 관해서 아무리 우리가 진술을 지어낸다 하여도 거기에는 언제나 진술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복음서의 독자는 어쩌면 이 근본적인 차이를 확인하고 우리 인간의 말을 모조리 소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교회의 신앙의 지지를 받아 자기의 스승을 역사적으로 지칭하고, 자기 나름대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더듬더듬 고백할 수 있게 된다고 하겠다.
- ‘제9장 빵, 말씀 그리고 역사’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