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광장으로 눈에 익은 인력거 한 대가 들어왔다. 까만 옷에 하얀 띠를 이마에 두른 인력거꾼을 보자마자 나는 단번에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운도 더럽게 없지. 하필 지금 나타날 게 뭐람.
“다 왔습니다.”
기영이 형이 이마에 땀을 훔치며 말했다. 인력거에서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뾰족구두에 발목까지 오는 엷은 흰 양말이었다. 곧이어 레이스 달린 분홍치마가 모습을 드러내고 허옇게 분칠한 얼굴이 툭 튀어나왔다. 어찌나 허옇게 칠했는지 표정마저 허옇게 질린 것처럼 보였다.
나는 괜히 입술을 삐죽이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엉덩이를 실룩이며 걸어가는 꼴 좀 보라지. 저 여자는 남자들의 시꺼먼 눈동자가 죄다 자기 엉덩이에 파리 떼처럼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 p.11
“조선인들이 아직도 쓰레기 처리법을 모르는 것 같아 가르쳐 주려 하는 게다.”
순사가 딱지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나는 그때 딱지가 벌떡 일어나 도망갈 거라 생각했다. 누구나 두려운 상황이 닥치면 살기 위해 도망가는 법이니까.
하지만 딱지는 도망가지 않았다.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감싸 쥐고 몸을 움츠렸다. 자신을 망가뜨릴 발길질을 기다리면서.
왜 도망가지 않는 거지? 어째서……. 혹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두 눈을 감고 머리를 감싸 쥔 딱지의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그리고 그 앞을 또 다른 그림자가 막아섰다.
“창씨는 위대한 천황폐하의 신민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다.
아직도 조선 이름을 버젓이 부르며 함부로 입을 놀리는 네놈 같은 것들은 훌륭한 신민이 될 자격이 없어. 그런 놈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순사 앞을 막아선 기영이 형 이마에 차가운 총구가 겨누어졌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주학이는 내뱉을 줄 몰랐고, 손으로 입을 막은 미향이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박 씨 아저씨의 가느다란 눈은 크게 팽창되었다. 바람도 나뭇잎을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구름만이 태양을 가리며 시간이 멈추지 않았음을, 이것이 꿈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 p.133
“나는 네가 여관 주인을 아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만.”
그래도 박 씨 아저씨는 앞에서 내게 욕을 하면 뒤에서도 욕을 하는 일관성 있는 사람이다. 누구처럼 앞에선 선한 척, 뒤에서 사람 뒤통수 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그런 장난은 안 쳐요.”
“뭐 어떻느냐. 나무를 나무라 부르지 않게 되면 그때부턴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지는 건데. 의미를 잃어버린 이름에 장난 좀 친다 한들 그게 무슨 큰일이겠느냐. 이름 좀 바뀐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선생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다.
‘형 이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악착같이 버티겠다는 거야? 막말로 이름 좀 바꾼다고 형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형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내가 형에게 했던 말이었다. 선생은 내가 형한테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던 거였다. 나를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말 분한 것은 어떤 말로도 반박할 수 없다는 거였다.
--- p.145
“여기 국밥 네 그릇이오.”
배고프던 차에 먹어서 그런지 뜨뜻한 국밥은 입에 넣기가 무섭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누렁이는 우리 중에 제일 빨리 국밥을 먹어 치우고 ‘한 그릇 더’를 외쳤다. 딱지는 동냥 그릇에 음식을 넣어 줘야만 밥을 먹었다. 순사에게 짓밟혀 부서진 동냥 그릇 대신 새로운 것을 장만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항상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누렁이의 동냥 그릇이 보이지 않았다. 누렁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불리 먹은 우리는 국밥 집을 나와 발 닿는 곳 아무데나 떠돌아 다녔다. 주인 없는 개처럼 이집 저집을 둘러보고, 상점 유리창에 머리를 처박고 신식 물건들을 구경했다.
쇼윈도에 비친 우리 넷은 비빔밥처럼 한 양푼에 모두 넣고 비벼도 절대 비벼지지 않을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은 경성의 거리였다. 한복과 양복 그리고 기모노가 뒤섞인 옷들. 조선말과 영어, 일본 말과 한자가 뒤섞인 간판들. 온 세상이 뒤범벅인데 우리 넷쯤 어울리지 않아도 뭐 어떤가.
--- p.1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