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이어야 한다는 정의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정의는 현실과 들어맞지도 않거니와 영원히 들어맞을 수도 없게 되어 있다. 최선의 정의를 내리고 나서 정치를 보기 시작하면 정치에 대한 좌절과 환멸은 불가피하다. 반면 최악의 정의를 내려놓고 정치를 보면 정치인들에 대해 한결 너그러워질 뿐만 아니라 정치 개혁은 ‘머리싸움’이며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정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정치’를 놓고 보자면, 정치는 행정과 더불어 ‘사익(私益)을 추구하는 비즈니스’에 불과하다. 이른바 ‘공공 선택 이론(public choice theory)’의 논지이지만, 이 이론의 이념성을 따질 필요는 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냥 술자리에서 거칠게 내뱉을 법한 “세상은 다 도둑놈 천지”라는 말을 점잖게 이론화한 것이 바로 공공 선택 이론이라고 해도 좋겠다. ---「제1장 정치에 침을 퉤퉤 뱉어놓고 독식하려는 사람들」중에서
계급과 세대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결혼을 해야 할 관계이자 문제다. 청년들이 활기차게 역동적으로 해야 할 일들마저 노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현실을 보자. 이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전관예우, 패거리주의, 연고주의의 문제지만, 결과적으로 세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여기서 문제가 되는 노인은 모든 노인이 아니라 권력과 금력을 가진 노인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세대와 더불어 계급을 같이 보는 시각이 필요한 것이다. 앞서 페터 비에리는 일자리가 인간 존엄의 문제라고 했지만, 그게 집단의 문제가 되면 기본적인 체제 유지의 문제가 된다. 세대론을 좁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가·사회의 재생산과 지속가능성의 문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대 간 계급 격차가 핵심이 아니라 그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제2장 ‘바리케이드와 짱돌’에 중독된 진보좌파?」중에서
정체성과 선명성에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붙는 게 이념성인데, 한국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도덕적 우월감을 만끽하기 위한 인정투쟁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렇다면 정당들 간 이데올로기 차이, 즉 색깔 차이도 무의미하거나 필요 없단 말인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정당정치의 원론과는 너무도 다른 이데올로기 오남용의 실체를 꿰뚫어보자는 뜻이다. 좌파는 아주 오만한 자세로 진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자유주의자의 한계’라거나 ‘시장주의자의 한계’라는 식의 딱지 붙이기로 구체적 논의를 대체한다. 어떤 이슈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건너뛰고 이념 공세로 모든 걸 때우려는 게으름을 피우면서 자신을 알아달라는 식이다. ---「제3장 “청년은 진보와의 결별도 불사해야 한다”」중에서
인간의 본능이라 할 사랑에 대해서도 그럴진대, 정치에 대해선 더 말해 무엇하랴. 정치를 ‘너희의 것’으로 보는 관점에선 청년들이 정당으로 쳐들어가야 한다는 말이 ‘청년 정치인’이 많이 탄생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들리겠지만, 그게 아니다. 정치를 ‘우리의 것’으로 새롭게 보는 ‘관점 혁명’부터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청년 정치인’론은 그간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어온 레퍼토리다. 그것도 꼭 선거를 앞두고서 말이다. 그간 정당들이 선거를 앞두고 경쟁적으로 쏟아놓은 청년 정책들은 실천되었는가? 그럴 리 만무하다. ‘청년’을 띄우는 건 늘 선거를 앞두고 벌이는 상습적인 이벤트에 불과한 것이니 말이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청년 정치인’ 육성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그런 육성의 주체가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제4장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라는 ‘한탕주의’」중에서
진보를 죽이는 학벌주의와 ‘고등교육 버블’을 유발하는 ‘낙수효과’ 모델을 깨기 위한 첫 번째 행동 강령이자 우리가 무슨 주문 외우듯이 외쳐야 할 구호는 바로 ‘하방’이다. 기존 서울 1극 체제와 그 당연한 귀결로 고착된 위계·서열 문화를 껴안고선 그 어떤 사회적 진보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서울에서 지방으로 하방을 하자는 게 아니다. 그게 어찌 가능하겠는가. 하방을 위한 여건 조성부터 시작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소탐대실(小貪大失)에 눈이 뒤집혀 이미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수도권을 더욱 비대하게 만드는 짓을 당당하게 저지르고 있으니, 이걸 어찌할 것인가. ---「제5장 왜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는 ‘불온서적’이 되었는가?」중에서
이제 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은 ‘박원순 모델’의 잔재를 훌훌 털어버리고 처음부터 당당하게 선언해야 한다. “때가 무르익으면 언제든지 정치를 하겠다”라고 말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운동 하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걸 나쁘게 보는 시각은 국회의원과 같은 고위 공직자가 되는 걸 개인적인 야망 달성이나 ‘가문의 영광’으로만 보는 기존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에 근거한 것이다. 청년 정치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을 깨부순 폐허 위에서 새로 탄생하는 정치 모델이며 그래야만 한다. 청년 정치가 꼭 진보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정의당뿐만 아니라 새정치민주연합과 새누리당 모두 청년 정치의 텃밭이 될 수 있다. 어느 정당이건 다 일장일단이 있다. 청년 정치는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