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욱(李煜, 937∼978)은 서주(徐州) 출신으로, 초명은 종가(從嘉), 자는 중광(重光), 호는 종은(鍾隱)이다. 오대십국 시기 남당(南唐) 중주(中主) 이경(李璟)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송(宋) 건륭(建隆) 2년(961) 금릉[지금의 난징(南京)]에서 즉위해 15년간 남당을 통치했기 때문에 세칭 이 후주(李後主)라고 한다. 이욱이 즉위할 때부터 남당은 이미 송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971년부터는 송에 대해 ‘칭신(稱臣)’했다. 개보(開寶) 7년(974) 송 태조가 여러 차례 이욱을 변경(?京)으로 오도록 했으나 끝내 가지 않자, 10월에 군대를 끌고 강남 토벌을 시작했다. 다음 해 11월에 금릉이 함락되고 항복한 후주는 포로의 신분으로 변경으로 압송당해 위명후(違命侯)에 봉해졌다. 포로가 된 지 3년째 되던 해(978), <우미인> 사의 “故國不堪回首月明中”, “一江春水向東流” 등의 구절이 문제가 되어 독살당하고 말았다. 향년 41세였다. 후에 오왕(吳王)에 추증되었고, 낙양(洛陽) 망산(邙山)에 장사 지내졌다.
이욱은 17세에 남당의 원로대신 주종(周宗)의 딸인 아황(娥皇)과 결혼했다. 이 여인이 바로 대주후(大周后)라고 불리는 소혜황후(昭惠皇后)였다. 결혼 후 10년 정도 지나서 대주후가 병이 들자 언니를 간호하러 궁정에 들어왔던 대주후의 동생과 눈이 맞았고, 소혜황후가 죽자 이욱은 이 여인을 황후에 봉했으며 언니보다 더 큰 사랑을 주었다. 이 여인이 바로 소주후(小周后)다. 소주후는 후주가 송에 항복한 후에도 변경에서 함께 생활했으며, 송 태종에게 개인적으로 멸시를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후주가 독살당하자 소주후도 슬픔 끝에 같은 해에 숨을 거두었다.
이기면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배재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 고전문학 이론을 전공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원굉도 문학 사상≫(한국학술정보)이 있고, 대표 논문으로는 <명말청초 이단 문학론의 실학적 이해>, <명말청초 방외 문학론의 근대 지향성 연구> 등이 있다.
문성자는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어 작품의 한국어 번역에 매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금익?근세 중국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고려대학교 출판부), ≪류짜이푸의 얼굴 찌푸리게 하는 인간 25종≫(예문서원), ≪잃어버린 천국 1, 2≫(플래닛)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