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학교 문과대학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에 있으며 한국이스라엘학회 회장, 한국이스라엘연구소 소장, 한국기독교콘텐츠학회 부회장, 한국이스라엘문화원 이사, 한국이스라엘친선협회 이사, 한국중동학회이사, 한국기독학생회 이사, 한국성서고고학회 이사, 강변성결교회 협동목사로 섬기고 있다. 학교법인 숭의학교 이사를 역임하였다. 서울신학대학, 서울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이스라엘 예루살렘 대학(M.A)에서 초기 기독교를, 미국 달라스신학교에서 성서강해(S.T.M)와 구약(Ph.D)을 전공하였다.
다윗은 엔게디 동굴에 들어와 용변을 보는 사울에게 접근해 그의 겉옷 자락을 살짝 베었는데, 다름 아닌 겉옷에 달린 ‘술’이었을 것이다. 애써 네 개의 술을 모두 자를 필요도 없었다. 하나만 잘라도 이미 그 겉옷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의 몸을 해치지 않았지만, 사울의 겉옷에 달린 술 하나를 ‘싹뚝’ 베어 버림으로써 사울 왕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주권에 온전히 자신의 삶을 맡기던 다윗으로서는 결코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의 권위를 손상시킨 자신의 행위 때문에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의 겉옷에 달린 옷단 술을 자른 다윗의 행동은 흥분한 추종자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누그러뜨릴 정도로 과감한 행동이었다. 만약 사울의 옷단 술을 자른 것이 대수롭지 않은 행동이었다면, 이 일 후에 다윗의 마음이 찔리고 괴로워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흥분한 추종자들을 무마시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p. 118-119
루디아와의 만남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통해 바울의 여정을 유럽 쪽으로 틀게 하신 성령께서 친히 중재하신 ‘특별한 만남’이었다.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는 ‘루디아’란 여인에 대해서 그런 대로 상세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녀는 소아시아에 있는 두아디라 성 출신으로 직업은 ‘자색 옷감 장수’였다. 1세기의 자주색 염색업과 관련된 배경 지식이 없는 오늘날의 성도들로서는 바울과 루디아의 만남 속에 감춰진 특별한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씌어진 1세기 당시의 성도들은 ‘자색 옷감 장수 루디아’란 말만 듣고도 즉시 성령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깨닫고 깊은 감사를 드렸을 것이다. ‘아하! 그래서 하나님이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 바울을 빌립보 쪽으로 인도하셨구나!’ p. 46
낚시에 일가견이 있는 몇몇 순례객들은 베드로고기를 먹으면서 그 정체를 놓고 약간의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향어과에 속하네.” “아니 무슨 소리야? 잉어과에 속하지.” 사실 베드로고기는 갈릴리 호수에서만 잡히는 토종 생선이기 때문에 한국의 낚시 전문가들이 쉽게 그 정체를 밝힐 수는 없다. 갈릴리 호수에서 잡히는 생선은 18종류인데 이중 특별히 3종류가 식용으로 사용돼 상업적으로 중요했다. 첫째, 베드로고기란 이름으로 거룩하게 포장된 틸라피아 갈릴레아(Tilapia galilea)이다. 이 생선을 유대인들은 ‘암눈’, 아랍인들은 ‘무쉬트’라고 부른다. ‘무쉬트’는 아랍어로 ‘빗’(comb)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이 생선의 등지느러미가 빗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은빛을 내는 몸통은 납작해서 튀김 요리에 적당한데, 굵직한 등뼈와 주변의 가시들이 쉽게 제거되기 때문에 먹기가 무척 쉽다. p. 159
혼자서 중얼거리며 암기하는 성서시대의 독특한 학습법을 이해할 때, 기존에 알고 있던 ‘묵상’의 개념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 묵상’은 ‘침묵 가운데 말씀을 음미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시대의 독특한 학습법을 이해하고 말씀 묵상과 관련된 시편의 구절을 살펴보면 ‘묵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
시편 말씀에 나오는 ‘묵상한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호게’(????)이고 묵상은 ‘히가욘’(?????)이다. 이것은 ‘중얼거린다’는 뜻인데, 침묵 가운데 명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주야로 중얼거리면서 말씀을 통째로 암기하는 사람이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 있는 자’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말씀 묵상을 했기 때문에 말씀 묵상을 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그가 어떤 말씀을 묵상하는지(중얼거리는지) 알 수 있었다. 말씀을 소리 내어서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것이 ‘말씀 묵상’이었기 때문이다. p. 184-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