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력의 근원이라 하더라도, 창공을 지배하는 제왕이라 해도 항상 빛나는 건 아니다. 가끔은 먹구름 뒤로 물러나 비를 뿌려주기도 하고, 시간이 되면 너그러이 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때로는 장난스럽게 하얀 구름 뒤에 숨기도 한다. 아주 간혹, 자의가 아닌 강제에 의해 빛을 잃기도 한다.
시기심을 이기지 못한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를 가로막고 자기 몸을 태우면서 태양을 등지고 그림자로 태양을 가린다. 태양의 빛이 사라진 대기는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사람들은 재앙의 징조라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 모습은 장관이지만, 그래서 더 슬프다.
하지만 달이 제 몸을 태우며 몸부림쳐도 태양의 빛은 다 가려지지 않는다.
짧은 시간이라도 태양의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달이 조용히 제자리로 물러나면, 그런 일은 꿈처럼 흩어져 태양은 늘 그랬던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비추고, 대지를 축복한다.
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을 사랑한다. 그러나 간혹 달 그림자에 가려진 태양이 그립다. 달 그림자에 가린 태양은 작은 나도 마주 볼 수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이기에.
빛을 잃은 너의 모습은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달 그림자에 가린 태양이 금반지처럼 아름답게 빛나던 모습처럼, 너는 그래서 더 아름답다.
태양처럼 선명한 네 생명력은 나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희미해진 네 빛은 나를 사로잡았다.
“지원아?”
멈칫. 흔들거리던 지원의 몸이 멈췄다. 그와 동시에 민석의 동작도 멈췄다. 지원이 몸을 일으켰다. 그와의 헤어짐이 서글픈 듯 낡은 나무 의자가 끼익 울었다. 민석의 눈동자가 지원의 등을 따라 그의 팔로, 팔을 따라 그의 손으로 내려왔다.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석양 아래 은빛으로 번뜩이는 미술용 나이프였다. 멈춰 있던 지원에게서 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I’m gonna tell you a secret. (내가 비밀을 얘기해 줄게.)”
이번에는 노래가 아니었다. 지원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해가 막 진 푸르스름한 색채 속에서 지원이 웃었다.
“Who killed my cat? (누가 내 고양이를 죽였지?)”
그건 분명히 지원이었다. 그러나 지원이 아니기도 했다.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 지원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지원의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민석이 아는 지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어른이 억지로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은 이질적인 목소리였다. 민석은 억지로 웃었다.
“갑자기 웬 영어? 집어쳐, 인마. 나한테 잘난 척해서 뭘 하려고.”
지원이 한 발자국 민석에게로 다가왔다. 이젠 점점 후회되기 시작했다. 지원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이.
“I, said a little boy. (나, 한 소년이 말했습니다.)”
“장난 그만해. 시원하긴 되게 시원한데, 이젠 좀 춥거든?”
지원은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가끔 아프다며 머리를 톡톡 두드렸던 지원의 설명이 ‘광증’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언제나 깨달음은 너무 늦었을 때 찾아온다.
“With my hands and insanity. (내 손과 광기로.)”
지원은 이제 민석에게 두 걸음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나이프를 든 손을 치켜들며 지원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민석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유리 같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I killed my cat. (내 고양이를 죽여 버렸지.)”
태양의 끝자락마저 사라진 밤. 이제 하늘의 주인은 달이 되었다.
먼 옛날 지원의 음울한 얼굴이 겹쳤다.
「그러니까 오지 마.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야.」
그 얼굴에 얼마나 진한 슬픔을 느꼈던가.
「나 때문에 네가 잘못되면, 난 절대 극복 못할 거야.」
민석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대로 서서 지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여기서 돌아서면 이 녀석은 무너질 거야.’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지원이 광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해칠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 뒤에 남겨질 지원이 더 두려웠다. 만약 반대의 경우라면, 민석이 무슨 잘못을 해서 지원이 죽거나 다치게 된다면……. 민석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병원 앞에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던 이동침대에 옮겨진 민석은 의식을 잃은 상태 그대로였다. 지원은 차가운 침대의 손잡이를 민석의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잡고 그 옆을 달렸다.
“바이탈은?”
“혈압 90/60, 맥박 120, 호흡 20, 의식소실, 안면·복부 타박상, 경미한 두부 손상으로 외관상 심한 외상은 보이지 않지만 다리 골절상이 심하고 출혈이 많아서 혈압이 많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어쩌면 체내 출혈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응급실로 옮겨진 민석을 의사가 와서 살피며 급히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IV라인 연결하고 급속 수액공급장치도 준비해요.”
“혈압이 80으로 떨어졌어요.”
“혈액형 교차시험 후 혈액형 혈액 최대한 빨리 구해서 급속 공급장치에 달아요. 심장음이나 호흡은 아주 양호하군. 복막자극 징후도 없고. 외상 검사부터 해요. 오늘 정형외과 당직 선생이 누구지?”
“김도형 선생님이신데요.”
“빨리 연락해요. 수술실에 연락해서 수술 스케줄 잡고 CT 촬영한 다음 수술실로 올려 보내요. 출혈이 심한 편이니까 혈액 충분히 준비해서 공급하라고 전하고.”
의사는 빠르지만 아주 침착하고 담담하게 지시를 내리며 응급처치를 했다.
“괜찮은 건가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지원은 이내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물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 한마디가 굉장히 큰일이라는 듯 짧게 말하고 의사는 응급실 복도를 걸어갔다.
“다리는요? 다리는요!”
의사의 뒤를 쫓아가며 지원은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 수술을 해봐야 알겠죠.”
“괜찮은 건가요? 운동을 하는 친구라…….”
“자세한 얘기는 담당 집도의에게 물어보세요.”
의사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이것이 의사에게는 일상일 뿐이라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다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잖아!”
지원은 살기 띤 눈을 번뜩이며 의사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 죄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풀 곳을 찾지 못한 분노가 꾸역꾸역 치밀어 올랐다.
“귀머거리야, 너!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먹는데!”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있는 병원에서 고용한 경호 업체 직원 몇 명이 달려와 지원을 의사에게서 떼어놓았다. 몇 번 콜록거리고 목을 주무르며 의사는 불쾌한 표정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하고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살고 못 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꼬깃꼬깃한 흰 가운을 바라보며 지원은 악을 썼다.
“그 자식은 태권도 선수란 말이야! 나중에 올림픽에 가서 첫 태권도 금메달을 따올 녀석이라고!”
무의미한 그의 비명과 같은 외침이 소란스러운 응급실 안을 울렸다.
“그 자식한테 다리는 그냥 걸을 수만 있으면 되는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