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거쳐, 1989년 장편 『피와 불』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하여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소설 『거품시대』는 조선일보에, 『불감시대』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되었으며, 장편소설 『피와 불』(『꽃 파는 처녀』로 개작) 『사랑은 길을 잃지 않는다』 『사람』(『나는 새를 위한 악보)』로 개작) 『거품시대』(전 3권) 『디스토피아』 『신·한국의 아버지』, 연작소설집 『우리 집 여인들』 등이 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장편 『피와 불』은 일본 도쿠마문고에서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문예지 『한국문학』 주간과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어쩌면 인생의 대부분을 시골에서 보낸 어느 누구보다도 능바우에 대한 나의 애정은 더 깊을 것이다. 내가 성년이 되기 전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있었던 유일한 경험이었다든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던 나의 뇌리 속에 깊게 파고든 시골의 정경과 인정 때문이었다든지, 여하튼 1년 반 동안 지낸 능바우에서의 생활은 내게 특별했다. 내 소설 여러 곳에서 배경 무대로 등장할 만큼 능바우는 내 정신세계의 원형이었다.(pp.14-15)
낮에 둘이서 들판에 나가면 내가 외숙모에게 국군가와 인민군가를 가르쳐주었고, 밤에는 신방으로 차린 골방에 앉아 등잔불 밑에서 외숙모가 나에게 유행가를 가르쳐주었다. 스무 살 새색시와 열 살 소년 사이의 아기자기함 속에서 1년 반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각별한 기억으로 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p.20)
색소폰을 불 수 있는 나이가 되고부터 그 무거운 색소폰은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오 대니 보이〉를 부는 동안 나는 바다 위를 나는 새와 같이 자유로웠다. 과거로부터, 자학감으로부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으로부터.(p.66)
그러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노인의 얼굴이 너무나 생소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대하고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pp.70-71)
나는 피우던 담배를 땅에 버리고 뒤돌아서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감정을 억누르려는 빛이 역력하게 이마에는 깊숙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아버지가 두 팔을 반쯤 벌렸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살그머니 껴안았다.
아버지의 자그마한 체구에서 풍기는 따스함이 내 몸에 와 닿았다. (……) 그러나 그런 따스함도 짧은 시간밖에 맛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그러나 하룻밤의 여유는 있었다. 다롄에서 웨이하이로 가는 바다 위에서의 하룻밤이긴 하지만 그 하룻밤은 내가 육지에서 보낸 40년보다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p.72)
“영감태기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선생이라는 작자가 동료 여선생을 꼬셔가지고…… 사상운동은 무슨 노무 사상운동…… 아이구야 사상운동 좋아하네…… 순진한 여선생 꼬셔가지고 사상운동한다 카고 데리고 다니다 가족 다 팽개치고, 함께 도망간 게 사상운동이가…… 세상이 우예 이리 무심할꼬? 그런 영감태기가 버젓이 살아 있다니…….”(p.107)
어머니는 고개를 들더니 눈물을 닦은 손수건으로 코를 ‘헹’ 하고 풀었다. 나는 마음이 놓였다. 어머니가 코를 ‘헹’ 하고 풀 때면 기쁨, 슬픔, 분노 할 것 없이 어떤 감정이라도 끝장을 보게 마련이었다.(p.108)
나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전쟁의 재앙을 포함해서 세상의 어떤 재앙이라도, 남편의 배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어떤 배신이라도 어머니라는 여자의 가슴속에서는 오래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p.109)
그러나 오늘 밤은 다른 꿈을 꾸고 싶다. 미래 한 시점, 우리 세 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데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고, 어머니는 코를 ‘헹’ 하고 푼 다음에 아버지를 용서하는 꿈이다. 세월의 흐름이 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세월의 흐름이 용서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월의 흐름은 죽음을, 한 서린 죽음을 맞이할 뿐이라는 것을, 나는 몰랐지만, 어머니는 당연히 알고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