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홍은 동진의 도교 이론가, 의학자, 소설가다. 자는 치천(稚川)이고 단양(丹陽) 구용(句容: 지금의 장쑤성에 속함)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여러 전적을 두루 섭렵했으며 특히 신선 양생술과 연단술을 좋아했다. 일찍이 갈현(葛玄)의 제자 정은(鄭隱)과 남해태수(南海太守) 포현(鮑玄)을 스승으로 삼았다. 도교를 신봉하고 의술에도 정통했다. 서진 혜제(惠帝) 태안(太安) 2년(303)에 유민 반군의 우두머리 석빙(石氷)이 양주(揚州)를 점거했는데, 영흥(永興) 원년(304)에 오흥태수(吳興太守) 고비(顧秘)가 석빙을 토벌하면서 갈홍을 장병도위(將兵都尉)로 삼았다. 석빙을 격파한 뒤 갈홍은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관직을 버리고 낙양(洛陽)으로 가서 이서(異書)를 널리 구해 탐독했다.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진 것을 보고 마침내 남쪽으로 내려가 광주자사(廣州刺史) 혜함(?含)의 군사(軍事)에 참여했다. 동진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가 승상(丞相)으로 있을 때 그를 초징해 속관으로 삼았다가 그의 공적을 보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했다. 성제(成帝) 함화(咸和) 초년(326)에는 사도(司徒) 왕도(王導)의 초징으로 주(州)의 주부(主簿)가 되었다가 사도연(司徒?)을 거쳐 자의참군(咨議參軍)이 되었다. 간보(干寶)의 추천으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선발되어 대저작(大著作)에 임명되었지만 고사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노년에는 연단(煉丹)에 열중하기 위해 구루령(勾漏令)을 자청했다. 가족을 이끌고 광주로 갔다가 광주자사 등악(鄧岳)이 붙잡는 바람에 나부산(羅浮山)에 은거하면서 자호를 포박자(抱朴子)라 하고 한가롭게 성명을 보양하면서 저술을 계속했다. 61세에 죽었다. ≪진서(晉書)≫ 권72에 그의 전(傳)이 있다.
저서에는 ≪신선전≫ 10권 외에 ≪포박자≫ 70권, ≪한서초(漢書抄)≫ 30권, ≪금궤약방(金?藥房)≫ 100권, ≪주후요급방(?後要急方)≫ 4권, 비(碑)·뇌(?)·시(詩)·부(賦) 100권, 이(移)·격(檄)·장(章)·표(表) 30권 등이 있다.
김장환은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세설신어연구(世說新語硏究)>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에서 <위진남북조지인소설연구(魏晉南北朝志人小說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강원대학교 중문과 교수와 미국 하버드옌칭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 객원교수(Visiting Scholar)를 지냈다. 전공 분야는 중국 문언소설과 필기문헌이다.
그동안 쓰고 번역한 책으로는 ≪중국문학의 벼리≫, ≪중국문학의 갈래≫, ≪중국문학의 숨결≫, ≪중국문언단편소설선≫, ≪유의경(劉義慶)과 세설신어(世說新語)≫, ≪중국연극사≫, ≪중국유서개설(中國類書槪說)≫, ≪봉신연의(封神演義)≫(전 9권), ≪열선전(列仙傳)≫, ≪서경잡기(西京雜記)≫, ≪세상의 참신한 이야기―세설신어≫(전 3권), ≪고사전(高士傳)≫, ≪태평광기(太平廣記)≫(전 21권), ≪태평광기상절(太平廣記詳節)≫(전 8권), ≪중국역대필기(中國歷代筆記)≫, ≪소림(笑林)≫, ≪어림(語林)≫, ≪곽자(郭子)≫, ≪속설(俗說)≫, ≪담수(談藪)≫, ≪소설(小說)≫, ≪계안록(啓顔錄)≫,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전 4권) 등이 있으며, 중국 문언소설과 필기문헌에 관한 다수의 연구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