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만나면 이렇게 좋은데, 나를 들여다 보기도 하는데.뭔가 한가닥 걷어내지고 정신이 들기도 하는데. 너와 헤어지면 나는 네가 꿈만 같구나. 나는 네게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는데 네가 희망을 가질까 봐 두렵고. 어쩌다가 내가 네 마음 아프게 하는데 소질이 있는 사람처럼 되어 버렸는지.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이런 것 뿐이라니, 답답하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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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어느 순간에 말이죠.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려갈 수 있을 것도 같아요. 그건 섬짓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그랬으면 싶기도 해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무엇이든 새로시작할 수 있을 것 아녜요? 다른 곳에서 새로 태어나서 아주 말짱히 새로 시작해보고 싶은, 그런마음 그쪽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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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첨성대 풀밭에서 은서는 완을 붙잡고 묻고 싶었다. 내가 너에게 희망을 가지면 왜 안되냐고, 그것이 왜 두려운 것이냐고, 이미 너에 대한 희망이 나를 살게 하는데, 그 희망이 끓기면 나는 병이 들 텐데, 너는 왜 그걸 모르느냐고. 묻고 또 묻고 싶었지만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은서는 끝내 묻지 못했다. 묻지 못했기에, 완의 희망을 갖게 될까봐 두렵다는 그 말은 서리처럼 가슴에 맺혔다.
어느 날부턴가 완 앞에서는 그랬다. 묻고 싶은 말이 목에까지 차올라 있는데고 물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 아니다,라는 확실한 무슨 대답을 듣는 것이 겁이 나서였을 것이다. 아니다, 라는 말을 듣느니, 그래서 깜깜해지느니, 묻지 못해 그 말이 서리처럼 가슴에 차갑게 맺히더라도 불확실한 게 은서가 견디기가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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