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끄면 네 얼굴이 방에 다시 들어와 누워 세가 스탠드 불을 끄려는데 은서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뭐라고?세가 은서의 얼굴 가까이에 귀를 대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세가 귀를 기울여 힘겹게 알아들은 은서가 중얼거리는 말은 불을 끄지마, 였다. 왜? 너무 환하잖니.은서가 세의 가슴에 이제는 가는 쌍꺼풀이 지워져버려 부은 눈을 힘없이 묻으며 속삭였다. 불을 끄면 네 얼굴이 안 보여.
--- p.266-267
백록담 흰사슴 봄 나들이.
은서는 신문에 실려 있는 사진 제목이 다치지 않도록 하며 긴목의 흰사슴을 가위로 오렸다. 사슴이 꼭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아 은서는 오려진 사슴을 바로 들고 쳐다봤다. 사슴은 산을 배경으로 눈처럼 하얗게 서 있다. 숫사슴인가? 긴 목을 들고 있는 이마 위로 뿔이 돋아나 있다. 뿔은 아직 하얀 귀보다 작다.
--- p.236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해도 그가 떠나길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 본문 중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느냐고. 여자가 남자에게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묻는 이런 질문은 소용없단다.시간이 지나면 형편없이 낯설어져 있거든.나를 바라봤던 사람은 다른 곳을 보고,나 또한 내가 바라봤던 사람을 버리고 다른 곳을 보고, 나를 보지 않던 사람은 나를 보지. 서로 등만 보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야.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는 관계속의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는 건 부질없는 짓이지.
--- pp.27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