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llo Scavo 1972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주의 카타니아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 신문 「아베니레」Avvenire의 해외 특파원이자 사법 사건 전문 기자다. 주로 조직적인 범죄와 국제 테러리즘을 탐사 보도해 왔다. 옛 유고슬라비아, 동남아시아, 구舊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나라들,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 지역 등 세계의 분쟁 지역에 대해 많은 보도를 했다. 저서로는 Adios Fidel. Fede e dissensonella Cuba dei Castro와 Di rata in rata. Viaggio nel paese strozzato dall’usura가 있다.
역자 : 최종근
1989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입회하여 1995년에 첫 서원을 했다. 1999년에 사제가 되었고, 같은 해에 대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성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2013년까지 교황청립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공부하고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원장이다.
“제가 오늘 살아 있으며 40여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제가 가장 낮은 자들의 권익 향상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음 전파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한마디로 지금 제가 지난 일들을 당신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분 덕분입니다.” 카라비아스 신부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한다. 녹슬지 않는 해방신학자로서(정확히 말해 ‘아르헨티나 판에서’) 카라비아스는 새 교황에 대한 공격을 “모종의 국제 자본주의의” 야비한 반발로 본다. 호르헤 신부는 이른바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종류의 성직자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세계의 가난을 고발하는 교황이란 너무 위험한 존재인 거죠”라고 그는 말한다.--- p.114~115
호르헤 신부는 이 정보를 듣자마자 구출 작전을 두 방향으로 개시했다. 세르지오를 군인들에게서 빼내는 일 그리고 아나를 피신시키는 일이었다. 평소처럼 이 예수회원은 혼자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돌아다니며 묻고 자기 주위를 살폈다. 몇몇 관리에게 찾아가 자기 친구들의 사건을 변호했다. 흔한 모험들을 겪고 난 뒤 그는 세르지오를 밖으로 빼내 올 수 있었다.--- p.146
그는 늘 아주 검소한 사람이었고, 실용적인 것들에서도 대단히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운전을 잘합니다. 그는 학장이 되고는 운전기사 자리를 없앴습니다. 대주교가 되었을 때도 직접 운전했습니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우리들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오케스트라 같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러 악기를 연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일간지 「오세르바토레 로마노」와 한 인터뷰에서 스칸노네는 베르골료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떠올린다. 한번은 베르골료가 “원고 타자를 한 다음, 빨래를 하고, 또 이어서 신자에게 영적 지도 면담을 해 주었습니다.” 주방에서도 대단했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베르골료식’, 속 채운 새끼 돼지고지 요리는 아직도 기숙사 사람들이 기억하는 요리다.--- p.159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초세기 그리스도교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복음서 자체에 있습니다. 만일 제가 오늘 2~3세기에 살았던 교회의 초기 교부들의 설교들 가운데 어떤 것들, 곧 가난한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강론으로 읽는다면, 여러분은 제 강론이 마오쩌둥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의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교회는 항상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교회의 보물로 보았습니다. 교구 행정 책임자였던 라우렌시오 부제의 박해 때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교회의 보물을 전부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 그는 가난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서 나타나서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2~3세기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복음에서 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의 정의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재정립시키는데, 바로 여기서 이 개념이 강화되고, 메데인 제2차 라틴아메리카 전체 주교회의에서 강력한 라틴 아메리카적 정체성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