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얼마나 좋게 보이는지, 그것이 당신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는지, 얼마나 재미있는지, 당신을 얼마나 성공하게 해 줄지, 그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깊어 보이는지, 얼마나 합리적으로 보이는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혹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정을 받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지혜(또는 말씀)와 반대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삶에 해롭고, 슬픔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와는 자신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굳게 믿었다. 그것은 좋은 선택이며, 그녀와 남편의 삶을 더 좋게 해 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 겉으로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해 당신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이롭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도 하와처럼 속고 있는 것이며 그 결과 큰 슬픔에 빠지게 될 것이다.--- p.44~45
삶 속에서 흘러 떠내려가는 일은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다. 어린 시절 호수에서 낚시를 할 때 가끔 빨리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배를 정박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정신없이 낚시를 하다가 30분 뒤에 고개를 들어 보면 해안선이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떠내려가 버린 것이었다.
우리는 진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그 진리로부터 멀어진다. 그 일은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고, 듣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초점을 두지 않는 것은 결국 우리 앞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떠내려가고, 하나님의 뜻 대신 주변 사람의 영향력과 사회의 목소리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불안정한 판단에 따라서 좋아 보이는 것을 받아들인다.--- p.67
우리는 예수님의 주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기반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나무 열매를 먹고 있다. 선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빼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많은 축복을 우리는 놓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정확한 영적 메시지 대신 시장성 있는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이 부자 청년이 오늘날 우리의 최첨단 교회에 왔다면 ‘구원을 받았을’ 것이고 머지않아 중요한 교인으로 간주되며 교회 임원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을지도 모른다.--- p.111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애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자신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는 일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는 단지 그들의 내면의 내비게이션이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를 드러냈을 뿐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살펴보면, 거기에 옷을 깨끗이 빨게 하라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중략)… 애굽의 쓰레기들이 아직도 사람들의 옷에 붙어 있었다.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안에 들어가기 전에 그것을 제거해야만 했다. 애굽은 타락한 세상 체계를 상징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눈의 만족을 위해, 지위와 명성을 위해, 즉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위해 산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초점이 아니다. 그보다 ‘어떻게 하면 내가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가 그들의 주안점이다.--- p.130
세상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권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대개 겉보기에는 노골적으로 반대되거나 악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 세상의 변화들은 진보나 선의 가면을 쓰고 있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세상이 그곳에 거하는 자들을 꾀어 창조주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뉴 인터내셔널 성경 백과사전은 선에 대한 정의를 더 깊이 다룬다. “세상적인 것은 일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에 관여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하지 않고 우리 문화의 관점과 가치와 태도들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적인 마음을 갖고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 무엇이 선과 악으로 간주되는지에 대한 기준을 세운다는 것이다. 기준을 정하는 관점, 가치, 태도들이 사실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지위와 평판과 명성에 대한 갈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 p.147
세상이 당신을 찾고 있다. 세상이 어떤 관계로 초청할 때는 종종 유혹적인 말, 논리, 아첨, 기회, 권력, 영향력, 그리고 항상 개인적인 이익이나 쾌락에 대한 약속을 수반한다. 그것은 뱀이 하와에게 다가간 방식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 줄 남자를 바라보는 간음한 여인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실상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계략이면서 마치 그 남자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 남자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은밀하게 그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 --- p.147~148
세상이 통제하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생각 속의 욕망, 의도, 동기들로 요약된다. 이곳은 전쟁터다. 여기서 계략이 세워진다. 여기서 세상과 벗하거나 간음하는 일이 시작되며, 결국 완성된다. 그리고 그 일은 교회에 거의 안 나가는 사람이나 절대 예배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나 쉽게 일어날 수 있다.--- p.152~153
나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구약 성경은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로 가득하지만, 신약 성경은 모두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도 각종 컨퍼런스와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계명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고 가르치며, 많은 사람이 그것을 확고하게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를 경험하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점에서 잘못되게 가르치는 자들은 자신들이 청중들을 자유롭게 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p.215
다시 한 번 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싶다. 이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의 지도자들에게 전한 말씀이었지만,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오직 ‘희망을 주는’ 말씀만 전하면 하나님의 뜻을 많이 전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교인들은 세상이 선하다고 간주하는 것에 이끌릴 것이며, 제대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아이처럼 어리석은 잘못을 범할 것이다. 결론은 그들의 핏값을 우리 손에서 찾게 될 것이다.--- p.252
만일 우리가 변화를 강조하지 않는 복음을 선포한다면 결국 깨끗한 그릇이 부족해질 것이고, 그 결과 이 땅에 하나님의 명백한 임재가 부족해질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던 것을 기억하라. 그 순간 하나님의 임재가 인간이 만든 그릇에서 나가 인간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그릇에 부어졌다. 그 그릇은 바로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영은 성전에서 나가 황혼, 나무, 아름다운 풍경, 노래, 비디오, 또는 다른 매체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분은 혈과 육의 그릇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그릇이 더러우면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약해질 것이고, 그 결과 불법을 막는 힘이 줄어들 것이다.--- p.290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한도를 알아보았다. 그것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초월하는 풍족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풍족함이 몰락의 원인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큰 기회가 된다. 풍족함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틀림없이 하와, 가인, 발람, 고라, 사울, 게하시, 유다, 알렉산더, 라오디게아 교회, 그 외 수많은 사람과 똑같은 덫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당신의 주요 목적이라면, 당신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풍족함을 적절히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분별력에 열쇠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분별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비례한다.
--- p.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