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빈번하게 개입하는 우리의 일상과 무질서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떨기에는 충분한 이야깃감이지만 서사예술이 되지는 않는다. 저마다 가진 소중한 사연이 소설과 영화, 드라마, 뮤지컬과 같은 서사예술로 만들어지려면 매혹과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내밀한 질서를 갖추어야 한다.
이야기를 서사예술로 바꾸는 내밀한 질서의 핵심은 서사 패턴이다. 이 책은 이야기를 다루는 작가, 연출자, 감독, 프로듀서를 위한 서사 창작방법론이다.
---「머리말」 중에서
픽션은 논픽션의 반대말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현실 위에서 생겨났다. 논픽션과 픽션이 태어난 자리도 바로 여기다. 그러나 논픽션의 서사는 사실에서 멈추지만 픽션은 사실에서 멈추지 않는다. 실재하는 이야기, 그 자체만으로 부족하다고 느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이야기가 꾸며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픽션은 논픽션의 반대편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논픽션의 다음 단계에서 출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픽션은 논픽션의 대척점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이다.
---「제1장 '이야기는 어떻게 서사예술이 되는가'」 중에서
첫 문장, 첫 장면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에게 첫 장면은 소설의 시작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첫 장면은 시작이 절대 아니다. 작가에게 첫 장면이란 소설 쓰기의 준비가 완료된 다음이다. 첫 장면을 쓴다는 것은 소설 쓰기의 준비를 마쳤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첫 장면은 소설 전체를 함축하고 규정한다.
---「제3장 '첫 장면은 서사예술의 시작이 아니다'」 중에서
첫 장면은 독자나 관객이 실제 세계와 서사 세계 사이에 놓인 경계에서 자연스럽게 서사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상당수의 서사 작품들은 흔히 익숙하고 편안한 일상이나 정경 묘사로 시작하는데, 이런 방법이 의도하는 바는 독자들의 경계심을 푸는 것이다.
독자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첫 장면은 배경 제시형, 일상 제시형, 인물 제시형, 회상형, 전체 압축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유형의 특징과 대표적인 작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략) 독자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려 서사 세계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작가들은 좀 더 강력한 방법을 사용한다. 강도 높은 첫 장면을 이용해 독자의 흥미와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독자가 미처 경계할 틈도 없이'다음은 어떻게 될까?' 혹은'다음 장면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작가에게 그보다 유쾌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첫 장면의 유형으로는 사건 발생형, 행동형, 대비 상징형, 의문 유발형이 있다.
---「제4장 '첫 장면의 아홉 가지 유형'」 중에서
모든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감동과 여운으로 남도록 만들기 위해 고민한다.[ 허공에의 질주]시나리오를 쓴 나오미 포너는 자신이 경험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마지막 장면을 만들어냈다. 배우 제이크 질렌할의 어머니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시나리오 작가 나오미 포너는 실제 수배생활을 했던 생생한 경험과 감정을[허공에의 질주]에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서사예술이 독자와 관객들에게 어떤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가는 마지막 장면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훌륭한 서사는 어느 한 부분의 성취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지만 미학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는 결말은 관객을 실망시키는 치명적인 요인이다.
---「제5장 '마지막 장면은 서사예술의 목표다'」 중에서
만 편의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적인 질서, 몇 가지 공통된 특징과 방법론이 있다. 이러한 공통점에 따라 플롯의 유형을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물론, 공통적 특성을 얼마나 광역화하고 세분화하느냐에 따라 플롯 유형의 숫자는 서너 가지가 될 수도, 수백 수천 가지가 될 수도 있다.
단, 플롯의 유형 분류가 창작자들에게 의미를 지니려면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범주화가 가능해야 한다. 어떤 특성과 공통적인 성질을 훼손하지 않고 반영하여 유형화 혹은 범주화가 가능해야 한다. 둘째, 일반화되어야 한다. 유형이 되었다는 것은 그 사용이 상당히 보편화되어 일반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외적인 특별한 방법론을 유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셋째, 범용성이 있어야 한다. 창작자에게 의미를 지닌 유형이 되기 위해서는 그 플롯의 유형이 창작에 적용되어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분석을 위해서가 아니라 창작에서 그 유형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위험성이 도출되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기준에 따라 필자가 분류한 플롯의 유형은 모두 아홉 가지다.
---「제8장 '서사예술의 아홉 가지 유형'」 중에서
배신과 헌신의 플롯은 동물적인 본능에서 비롯된 배신과 인간적인 이성에서 비롯된 헌신 간의 갈등을 그리는 서사유형이다. 배신과 헌신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필연적인 선택의 과정이다. (중략)
그날 밤 나는 30분에 걸쳐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썼다. 마법의 잔을 발견한 다음 그 잔에 눈물을 흘리면 눈물이 진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한 남자에 관한 음울한 이야기였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항상 즐겁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눈물을 흘려 부자가 될 수 있도록 슬퍼지는 방법을 찾아냈다. 진주가 쌓여감에 따라 그의 탐욕도 커져갔다. 산처럼 쌓인 진주 옆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칼을 손에 든 채. 아내의 시체를 안고 잔에 하염없이 진주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끝이 났다.
- 할레드호세이니,[ 연을쫓는아이], 열림원, 2008, 50쪽.
이 소설 속 소설의 아이러니는 한 남자가 진주를 얻기 위해서 아내를 죽이고 눈물을 흘리는 상황에 있다.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아이러니가 감춰져있다. 아미르가 읽어준 이야기 가운데 하산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10세기의 고대 페르시아 영웅서사시인[왕들의 이야기]에 나오는[로스탐과 소랍]이야기로, "로스탐이 용맹스러운 적 소랍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소랍이 오래전에 잃어버린 로스탐의 아들이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이 줄거리 역시 아이러니인데, 더 큰 아이러니는 아미르에게 눈물 고인 눈으로 한 번만 더 읽어 달라고 간청하던 하산이 뒷날 자기 아들의 이름을 소랍으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제8장 '서사예술의 아홉 가지 유형-배신과 헌신 플롯'」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