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푸레한 이야기
미류나무 숲을 통과하면 새벽은
맑은 연못에 몇 방울 푸른 잉크를 떨어뜨리고
들판에는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나그네가 있었지요
생각이 많은 별들만 남아 있는 공중으로
올라가고 나무들은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내 느린 걸음 때문에 몇번이나 앞서가다 되돌아 오던
착한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나그네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았지요
--- p.90
대개의 인간들이란 자신이 어떠한 형식적 자극을 통해서만 고통을 당하는 듯이 생각하고, 심지어 자신의 근원적 아픔까지도 단순한 몇 개 이유들로써 도식화해 버린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어. 예를 들어 물질의 있고 없음이나 정신의 해방 구속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미치지 않는 곳에 내 생의 알 수 없는 비애가 있다. 아아, 긴장감 없는 생이란. 난 월남전이 계속되고 있었더라면 자원해서 파월장병들 틈에 끼어버렸을 거야. C읍에 너와 내가 무작정 기차를 타고 도착해서 이곳에 우연히 앉아 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될까. 우리가 몇 개월이 지난 이후에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행여 우리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쓸쓸함을 제거한다고 해도 그것은 제거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모습으로 변형된, 쓸쓸함으로 다가올 뿐이야.
--- p.107-108
내 의식의 등유가 미친 듯이 출렁거렸다. 나는 아득히 내 아는 이들의 얼굴을 생각하고 천천히 허공을 향해 호명했다. 말은 나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 보았다. 나는 흔들리는 연기처럼 수직으로 일어섰다. 편지 잘 받았다.이곳은 대학도서관. 네 친구는 아무도 읽지 않는 얇은 책처럼 작은 방 안에 꽂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지일 것이다. 나는 요즘 항상 그것만을 생각한다. 모든 것은 믿을 수 없다. 기억도 그렇다.
--- p.57
나의 허약한 논리와 철학은 은어비늘 한 개만큼의 각질도 아닌 부스럼 같은 더러운 것이었고 또한 나의 이 선험적인 감상은 무수히 은빛 갈기를 칼날처럼 번득이는 수만 평 갈대밭을 헤쳐나가는 빈자의 허기만큼의 값어치도 없는 것을. 문학이 나에게 구원이 되기에는 너무도 요원하고 아득한 수평선임을. 또한 나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기에는 아으, 나보다 먼저 읊고 있는 두뇌와 영감의 판관들에게 굴복당하고 '탄생치 않음의 인정'을 용납해야 하는 나의 기가 막히는 자존심 따위. 그렇다면 나의 문학적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절망...... 세상에 대한 내부의 복수심? 만약 그렇다면 오 나의 유년, 사춘기의 아득한 절망과 그 서열의 약(藥). 이 단단한 세상에 대한 나의 대리석 같은 가면과 그 대리석 기둥 속에서 마모되어지고 균열되어지는 낡은 판화조각[石版] 같은 나의 약점에 대한 반발의 덮개는 무엇으로 설명될까. 끝없는 비상, 환상과 상상력 속으로 도피하는 백치의 모습이여. 어쩌면 그것은 18세기 영국풍의 안개 낀 세인트 폴 광장의 검은 박쥐우산 속의 해쓱한 청년의 잿빛 눈 빛 혹은 호밀분 날리는 광막한 겨울 러시아 평원을 달리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희미한 향수의 빛을 부리는 젊은 백작의 마상(馬上) 얼굴. (p. 70)
--- 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