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뒤편의 언덕 위, 나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 틈만 나면 찾아오던 곳이지만 오늘은 느낌이 다르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언덕 아래를 주시하면서.
저 아래, 집 근처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다.
눈 덮인 골짜기는 무척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꽁꽁 얼어붙은 강 옆에는 칙칙한 모습의 우리 집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데…….
지금쯤이면 집 안을 따뜻하게 해 주던 벽난로의 장작불이 꺼졌을 것이다. 벽난로에 장작을 넣을 사람이 없으니까. 모두가 떠나 버렸고, 나는 온종일 언덕에 앉아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중이었으니까.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모두 떠났다는 증거다. 전부 떠나 버렸다. 한 명도 빠짐없이.
아빠도 떠났다.
매그다도 떠났다.
나머지 사람들도 떠났다.
하지만 왜 떠났는지 모르겠다.
말해 줘, 울프. 난 어떻게 해야 해?
--- pp.9~10
불가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담화 시간’이면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모든 것이 완전히 꽁꽁 얼어 버리기 전이었던 옛날의 일들을 말이다. 그때는 집집마다 트럭이나 승용차가 있었고 전기나 물이, 심지어 뜨거운 물이 벽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담화 시간의 ‘단골손님’이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옛날은 옛날일 뿐이다. 바다가 제 기능을 하던 세상, 눈이 내리고 또 내리고 끝없이 내려서 멈출 줄 모르는 세상이 오기 전의 시절이었다. 어른들은 옛날 일을 떠올리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들이 그때를 잊지 않도록 옛날이야기를 계속 해 주는 거겠지만, 내 생각에는 오히려 어른들 자신이 그때 일을 잊지 않으려고 계속 되풀이하는 것 같다.
--- p.12
큰 개가 뛰어올랐다. 하지만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내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횃불을 이리저리 휘둘렀기 때문이다. 나는 개가 겁을 먹도록 정말 크고 우렁차고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어린 개들은 노여움과 불의 신이 된 나를 보고 놀라서 꼬리를 감추며 돌아섰다. 이제 큰 개는 다른 개들에게 왜 자신이 대장인지 보여 줘야 했다. 그래서 입을 험악하게 비죽이며 으르렁거렸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대장 개는 더러운 붉은 입에 분노를 가득 담고 곧장 나를 덮칠 것이다. 개가 이빨을 드러내자 이빨 사이의 핏자국과 침이 보였다. 오늘만 벌써 두 번째로 보는 거였다.
원을 그리며 돌던 대장 개가 그때를 틈타서 재빨리 덤벼들었다. 내가 횃불로 강타했다. 개가 왼쪽으로 날아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내 팔로 달려들었다. 덥석! 하지만 내 팔을 물지는 못했다. 암캐가 아주 가까이 다가와 내 등에 업힌 뼈만 앙상한 메리를 보며 군침을 흘렸다. 내가 현명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암캐가 내 옆구리를 물어 쓰러뜨릴 것이다.
--- pp.100~101
“우린 저 아래로 내려가야 해요, 윌로. 배가 떠나기 전에요.”
“그게 더 나을까, 메리? 배가 어디로 가든, 여기보다 나을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우리를 데려다줄 배예요. 섬으로요. 새로운 시작이 펼쳐지는 곳, 안전한 곳으로요.”
“안 보여? 여기에 다 있어. 여기가 바로 우리가 있을 곳이야. 산이 있고 나무가 있는 곳. 저 너머에 계곡이 있고 드넓은 하늘이 있는 곳. 얼음은 물이 얼어붙은 것일 뿐이야, 메리. 그 사실을 큰 소리로 분명하게 외쳐야 해. 여기가 그 섬이야. 네가 있고 내가 있는 이곳. 섬은 바로 여기야. ‘우리 안에’ 있어. 이제야 알겠어. 머릿속에는 얼마든지 좋은 생각을 심을 수 있어. 바다에 떠 있는 저 배처럼,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어떤 생각을 품으면 아무도 그걸 손댈 수 없어. 스스로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않는 한. 이제 알겠어.”
--- pp.398~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