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행간읽기] 그 네 번째 이야기!
왕조 중심의 이념 ‘천하일통’이 가져온 중국사 인식의 허상!
구체적인 실상으로 허상을 깬 새로운 시각의 중국사!
책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중국 역사는 통일 지향적’이라는 논리를 어떠한 검증도 없이 믿고 있다는 크나큰 오류를 지적한다. 물론 한편에서 이 논리에 대한 약간의 반론이 있었지만, 이 논거는 통일 지향적 사관에 매몰되어 버린 지 오래이다.[중국분열]은 통일 지향적이라는 허구를 깨뜨리기 위해 역사 속의 구체적인 사실을 검토하였고, 중국이 통일되었던 기간보다 오히려 분열된 기간이 더 길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우리는 중국사에 있어, 어째서 사실과 다른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고, 오인하고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중국의 이념에 있다. 즉 ‘중국은 통일되어야 한다.’는 ‘일통론’적 이념이 분열은 나쁜 것, 통일은 좋은 것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이념으로 인하여 제대로 역사를 보지 못한 채 왜곡된 진실을 진짜라고 인식한 우를 범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전체로 쓰인 왕조 중심의 역사서들이 이러한 이념을 뒷받침해 왔다.
이제 왜곡된 시각의 중국사 인식은 고쳐져야 한다. 이제는 이념적 역사관으로 무장한 정사(正史)라는 이름의 왕조사가 창작한 허상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이제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실제의 역사로 그 흐름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이다.
"중국 역사는 과연 통일 지향적이었는가?
아니다! 분열 지향적이었다."
중국은 넓은 영토라는 자연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각 지역마다 독특한 경제와 문화, 사상적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천하일통(天下一統)’이라는 이념 아래, 황제는 통일된 하나의 법률로 성격이 다른 여러 지역의 특성을 하나로 묶는 부자연스런 현상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강압적인 정책은 강력한 황제권이 형성된 시대에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시대에는 여지없이 힘의 한계에 다다라서 자연스럽게 분열의 길로 나아갔다. 중국 역사에서 시대가 바뀌어도 그 명칭을 달리하거나 제도를 달리 할 뿐, 이러한 현상은 반복되고 있었다.
중국!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 잡은 중국은 날로 강해져서 드디어 G2로 불리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지 65년. 청말에서부터 시작한 군벌의 활동으로 분열된 중국이 완전히 종식되고 강대국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 현재의 통일된 중국은 얼마나 유지될 것인가?
어느 역사에나 치세의 시기와 난세의 시기가 존재한다. 중국의 3천여 년의 역사를 살펴볼 때, 치세와 난세를 구분하기 위한 기준점을 크게 왕조 중심 사관과 혈통 중심 사관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왕조 중심의 사관에서는 통일된 왕조를 치세, 분열된 왕조를 난세로 구별한다. 다음으로 혈통 중심 사관의 경우, 이합의 교차, 혹은 순잡의 교차를 설명하면서 합·순의 시기를 치세라고 서술해 왔다. 즉 북송과 명나라는 합(合, 통합), 순(純, 순수 한족의 왕조)이자 치세이며,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는 이(離, 이산), 잡(雜, 한족과 이족이 섞인 왕조)으로 보아 난세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통일과 분열로 치란을 구분 짓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무제 시기에는 분명 천하가 황제의 지배하에 통일되어 있었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았다. 반면 오대십국은 틀림없는 분열의 시대였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았지만, 남부 지역의 오월에서는 전쟁을 막으면서 문화적·경제적 부흥을 이루어 냈다. 이렇듯 이합과 순잡으로 치란을 구분 짓는, 민족 국가 시대는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시각에는 수많은 반례가 있으며, 이러한 구분은 감히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일이 좋고, 분열이 나쁘다는 인식 때문에 막연히 중국 역사는 전체적으로 통일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중간 중간 혼란의 시기가 있었던 것뿐이라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중국 역사의 본모습은 오히려 대부분이 분열된 시기였고, 통합의 시기가 짧았다.[자치통감]에서 다룬 1,362년간의 중국 역사를 바탕으로, 그것이 종전의 견해와 달리 분열 지향적으로 흘러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이념과 사상에 따라 편협한 시선으로 선과 악, 좋고 나쁨으로 역사를 왜곡해 왔다. 따라서 통일이 좋고 분열이 나쁘다거나, 반대로 분열은 좋고 통일은 나쁘다는 생각으로 중국 역사를 보아서는 안 된다. 이제는 어떠한 이념이나 사상에 휘둘리지 않고 중국사를 올바르고 새롭게 보는 시각이 절실하다.
이 책에서는 통일과 분열의 타협점을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과거부터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해답 없는 과제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분열]은 천하일통의 꿈이란 만들어진 꿈이며, 실제의 역사는 각 지역이 독자적으로 자기들의 영역을 경영하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저자의 변]
"중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역사학이 발달했다. 그리하여 많은 역사기록물이 생산되었고, 왕조 중심의 역사를 쓰는 전통도 마련되었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마련된 역사서들은 많은 사람이 읽어 왔고, 이를 읽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믿었다. 왜냐하면 읽는 사람이 그 책을 비판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를 쓴 사람들이 나름대로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기에 믿음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왕조를 중심으로 역사를 쓴다는 것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서술의 중심이 왕조, 왕실이라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왕조에 편향된 서술을 할 수밖에 없는데, 당시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를 간과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왕조 중심의 역사를 쓰게 된 것은 후한대에 쓰인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서 시작된다. 후한대는 유가 사상을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또 유가 사상을 가지고 왕조를 유지하려고 했던 시대였다. 유가 사상의 충효를 극대화하여, 비록 생후 7개월이 된 황제일지라도 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그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논리로 왕조를 유지하려 했었다.
그러므로 후한대에 쓰인 [한서]는 전한대에 쓰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비한다면 철저한 왕조 중심의 역사였다. 천하를 놓고 쟁패를 벌였던 전한의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를 서술할 때, 유방은 황제의 전기를 기록하는 [제기(帝紀)]에 넣고, 항우는 일반적인 인물의 전기를 기록하는 [열전(列傳)]에 넣고 있다. 이러한 형식을 보면 유방은 황제이고, 항우는 황제에 반대하는 남부 세력 정도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전한시대에 쓰인 [사기]에서는 비록 사마천이 전한이 황제권을 완전히 발휘했던 무제(武帝)시절에 살았던 인물이지만 항우와 유방을 다같이[제기]에 넣고 있다. 한 조정이 올바른 왕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도, 한 왕조를 세운 유방과 그와 천하를 두고 쟁패했던 항우를 같은 수준이라고 평가한 것이니 공정하게 쓰려고 한 것이다. 물론 당시는 아직 유가의 충효가 완전히 이념으로 자리 잡지 않은 시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서술은 역사가로서의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래서[사기]는 사마천이 죽은 후에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후한대에 살았던 반고는 자기가 살고 있는 후한의 정당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먼저 후한의 앞에 있던 전한 왕조가 올바른 왕조였음을 증명해야 했다. 후한의 유수가 왕망에게 멸망한 유(劉)씨 전한의 부흥을 내걸었기 때문에, 적어도 유방의 전한이 정당성을 가져야지만 후한의 정당성이 마련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방과 항우의 경쟁도 올바른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의 싸움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고의 [한서]가 세상에 나온 이후로, 하나의 왕조가 멸망하면 그를 뒤이은 왕조는 대체적으로 전 왕조의 역사를 서술했다. 역사가가 살고 있는 현 왕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전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고, 그 정통성 있는 왕조를 정당하게 이어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하나의 왕조가 멸망하면 그 왕조 중심의 역사를 쓰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고, 이른바 정사(正史)라고 불리는 [25사]는 대부분이 이러한 단대사(斷代史)로 이루어졌다. [사기]와 위진남북조시대의 [남사]와 [북사], 그리고 [오대사] 정도가 여러 왕조를 동시에 취급하고 있어서 어느 왕조에 편향된 저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통사(通史) 속에도 개별적인 왕조가 중심이 되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역사를 보는 시각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역사기록은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면서 보아야 역사를 쓴 사람의 시각에 매몰되어 이를 추종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쓰인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은 오히려 읽지 않는 편이 낫다.’라는 맹자의 말을 다시 한 번 새겨 볼 부분이다
사실 그동안 중국 역사학에서는 수 없이 진실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그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은 구체적인 사안(事案)이나, 인명, 지명의 고증 등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아주 미시적(微視的)인 작업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하면 거시적(巨視的)으로 역사를 쓴 작자의 입장과 시대 분위기를 검토하고, 어떻게 역사를 편향적으로 썼을까를 고려하면서 비판하는 것에는 그다지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앞에 놓인 이른바 정사라고 불리는 [25사]는 어느 한 쪽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편향된 역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자료가 워낙 방대하고, 치밀하며 구체적 자료를 수집하여 이룩한 것이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그것에 압도되어 전체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농후했다.
특히 한문으로 되어 있는 자료들을 중국의 학자들이 그대로 수용하다 보니, 중국사를 연구하는 다른 나라의 학자들이 그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중국학자와 차별되는 시각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주변의 한국이나 일본, 그리고 근세에 들어와서 현대적 역사학을 발전시킨 구미에서도 부지불식간에 [25사]를 정사로 인정하고, 중국 역사는 하나의 왕조에서 다른 하나의 왕조로 면면히 이어 온 것이라고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중국사는 통일 지향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믿게 된 까닭이라고 할 수있다.
만약에 검사나 판사가 사건을 진술하는 피고인과 변호사의 말을 무조건 믿는다면 그들이 재판한 결과는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재판관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진술하는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믿지 않는 태도로 올바로 재판해주기를 원한다. 그런데 중국사에 대한 평가는 변호사가 워낙 막강한 실력과 자료를 가져다 대는 바람에 그에 압도된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즉 역사가가 서술한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임에 틀림없지만, 과거에 많은 사람이 옳다고 믿어 왔고, 그러한 명성을 가진 역사사실에 대하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못하고 그냥 명성에 짓눌려 믿어 온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사를 중국을 통일한 한 왕조에서 또 다른 왕조로 이어지는 것으로 이해했고, 하나의 왕조에서 다른 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 약간의 혼란, 혹은 반란이 있었을 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여 천하일통을 해 왔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래서 위진남북조와 5호16국시대라는 긴 분열의 시대는 오히려 중국 역사의 비정상적인 시대로 인식되어 왔다. 그 외에 분열의 시대로 오대시대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기간이야 불과 50여 년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긴 역사에서 본다면 극히 예외적인 시대로 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바로 정사로 불리는[25사]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정사(正史)의 관념뿐만 아니고 정통(正統)이라는 관념도 생겼다. 정통이란 바로 천하일통을 이룬 왕조를 하늘의 뜻을 받아서 올바르게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받은, 즉 천명(天命)을 받은 올바른 왕조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고조 유방은 하늘의 계시를 받은 듯 ‘백제(白帝)’의 아들로 둔갑되었다. 적제(赤帝)를 누른 백제의 아들이 하늘의 뜻을 받았다고 설득시키기에 유리했던 것이다.
정말로 유방과 항우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올바른 사람이었는지는 판가름하기 어렵다. 또 옳고 그르다는 기준을 세울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서부 세력을 대표한 유방과 남부 세력을 대표한 항우의 싸움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반고의 [한서]에서는 분명하게 유방을 정통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후세에도 이를 정당하게 이어받았다는 것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중국 역사가 통일 지향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이해하는 것은 역사기록이 만들어낸 잔상(殘像)일 수 있다. 이른바 정사라는 역사서를 읽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중국이 왕조중심으로 천하일통을 이룩했고, 그것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고 말이다.
물론 하나의 왕조가 분명히 천하일통을 하려는 노력을 해 왔다는 점에서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천하일통을 이루고 싶은 마음’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헤게모니를 잡고 중앙으로 진출한 중앙 조정에 대하여 독립하려는 많은 지방 세력이 항상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들 지방 세력들이 독립하려는 노력을 역사에서는 가볍게 생각하고, 반란 혹은 반역이라는 이름으로 간과해 버린 것이다.
이 책은 반란 혹은 반역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많은 지방 세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지방 세력들이 정식으로 군사를 일으키는 행동을 일으키기 전과 후에도 계속하여 독립적으로, 또는 반(半)독립적으로 존재했음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천하일통이라는 억지스러운 꿈!
이러한 작업을 한 결과, 천하일통을 이루었다는 한(漢) 왕조도 명목상으로는 200년간 왕조를 유지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방에 세웠던 봉건 제후국이 나라를 독자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 왕조의 통일이란 이름뿐인 통일이며, 사실 반독립이라는 형식으로 지방에 존재하는 세력을 인정하고 그와 타협하여 만들어낸 결과였다. 지방봉건국의 자율성이 거의 없었던 완전한 천하일통이란 불과 40~50년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중앙의 황제가 끊임없이 천하일통을 이루려는 것은 일장춘몽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꿈에서 깨어나 보면 여전히 제각각 지역별로 분리해 왔다.
이러한 분열의 원인은 자연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이라는 넓은 영토는 각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적 특성은 경제와 문화, 사상적 차이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런 현상이다. 반대로 천하일통을 지향한다는 말은 하나의 법률로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관습적으로 다른 지역을 하나로 묶는 부자연스런 현상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할 때에는 어느 정도 통일이 가능했지만, 그 강제적 힘이 한계에 부딪치면 바로 분열의 길로 나가고 있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보면 장안과 북경, 그리고 남경으로 대표되는 서부와 동부, 그리고 남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경제적 환경과 습관, 그리고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설혹 합쳐 놓았다고 하여도 바로 분리되는 현상을 보였다. 설사 시대가 바뀌어도 그 명칭을 달리하거나 제도를 달리 할 뿐, 거의 똑같은 현상이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다.
역사는 순리에 맡겨 두는 것이 정상적인 흐름이다. 그러므로 강제적인 천하일통보다는 각 지역별로 그 지역에 맞는 독자적인 방법과 제도를 창안하고, 독자적인 삶의 방식을 영위하는 것이 바른 역사의 흐름이다.
분열이 악인가?
그런데 중국 역사에서는 각 지역적 분열을 마치 ‘악(惡)’처럼 인식해 왔다. 따라서 분리독립하려는 세력을 반역이나 반란 같은 부정적인 용어(用語)를 사용하여 기록하고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들 세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중국사는 천하일통이 대세이고, 올바른 방향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컨대 당말오대의 200년간의 분열기간 중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오래도록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남부 지역, 오, 오월 등의 문화와 경제상태가 대단히 좋았다는 연구 보고를 보더라도, 분열이 결코 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도 그의 역사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위로부터 서로 주고받은 것을 가지고 옳은지 그른지를 삼는다면 진씨(陳氏, 남조의 진)는 어디에서 황제 자리를 받았습니까? 탁발씨(拓跋氏, 북위의 탁발규)는 어디에서 받았습니까?
만약 중원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가지고 옳은지 그른지를 삼는다면 북방족인 유(劉), 석(石), 모용(慕容), 부, 요(姚), 혁련(赫連)씨들이 차지했던 영토는 모두 오제와 삼왕이 있었던 옛날의 도읍지였습니다. 만약에 도덕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옳은지 그른지를 삼는다면 최이(?爾)의 나라에도 반드시 훌륭한 주군은 있을 것이며, 삼대의 말년에는 어찌 사악한 벽왕(僻王)이 없었겠습니까? 이리하여서 정윤의 이론 가운데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그 뜻이 관통할 수 있거나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 옮기거나 빼앗아버릴 수 없는 것은 아직 없습니다.
이는 정통론이란 정치적 이유에서 만들어낸 것이며, 옳고 그른 것으로 결론 내리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그에 덧붙여서, 보잘것없는 최이의 나라에도 훌륭한 주군이 있을 수 있고, 정통 왕조이며 치세를 이루었다고 말하는 삼대에도 공정하지 못하고 편벽된 벽왕이 있었다고 하여 천하일통을 이루어야만 백성들이 편안할 수 있다는 논리에 반대한 것이다.
만약에 역사를 왕조를 세운 사람 중심으로 보고, 또 백성들의 삶보다도 왕조의 운명이 중요하다는 시각으로 본다면 단대사적 시각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천하가 모두 제왕의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왕조의 운명은 역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할 이유가 없다. 마치 한 개인의 운명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하나의 사건인 것처럼, 왕조의 운명도 하나의 사건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제도와 조건이 만들어지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다. 그렇다면 보다 많은 백성들에게 밀착되어 있는 지방별 독립적 체제가 상대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국의 세 중심축
그러한 점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는 이른바 반란과 반역을 지방 세력으로 독립하려는 역사의 움직임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중국의 전(全)역사의 흐름을, 헤게모니를 잡은 세력과 그 반대되는 세력은 서부와 동부, 그리고 남부로 대별되는 것을 본 것이다.
이 책은 [자치통감] 행간읽기의 일환이기 때문에 일단 [자치통감]이 끝나는 오대까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후에 전개되는 역사도 대체적으로 이러한 지역적 대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송 왕조가 세워졌을 때에는 서부에 하(夏)와 북부에 요(遼)가 있어서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고, 이어서는 여진의 금 왕조와 남송의 남북 대치가 분열의 역사를 진행시키고 있다.
몽고의 원(元)이 중국을 지배했을 때에 이들은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을 구분지어 남북을 별도로 통치하려고 했다. 명 왕조가 남부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건문제와 연왕의 싸움으로 대표되는 남북간의 대결이 있었다. 그 후에 동북부가 헤게모니를 잡자 명말에 남부와 서부, 특히 서부의 이자성(李自成, 1606년~1644년)의 기병으로 명 왕조는 그 운명을 마감한다. 다시 청대가 되어서도 역시 만주족인 북방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하자 남부를 중심으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손문의 혁명운동은 청 왕조에 대한 남부의 반발이었다. 그 후에 존재했던 군벌 세력의 분립도 이러한 지역적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천하일통을 꿈꾸는 정권이라면 어떻게 서로 다른 각 지역의 이해를 평화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변수였다. 그러나 하나의 법률과 제도로 서로 다른 환경의 지역을 아우른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이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이후 60년을 볼 수는 없을까? 사실 지난 60여 년을 보면 홍콩과 대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였지만 나머지 광대한 영역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역으로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역사 무대에서 중국의 영역이 아니었던 동북의 만주, 몽골, 청해(靑海), 신강(新彊), 티베트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례없는 대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군사력으로 이들 지역을 장악했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비난할 수는 있지만 도덕적 이유를 가지고 역사의 진행을 돌려놓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역사가 힘과 형세에 의하여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막연하게 중국을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미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제 시절, 한 무제 시절, 왕망의 신(新)왕조 시절, 수양제 시절, 그리고 당 태종 시절에도 힘으로 통일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일이 있고, 우리는 보아 왔다. 그러므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여 60여 년간 통일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다만 그 힘이 얼마나 계속 유지될 수 있고, 또 그 힘이 얼마나 역사의 흐름을 가로 막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볼 뿐이다. 이 책에서는 그 힘이 역사의 흐름을 가로 막지 못했던 사실을 누누이 보았다. 그래서 그러한지 현재 중국 영역 가운데 원래 중국 영역이 아닌 지역, 즉 만주, 몽골, 청해, 신강, 티베트 등지에서 끊임없이 반발과 소요가 일어나고 있다. 마치 한 무제가 통치하던 엄형주의 시절에도 끊임없이 반발이 있었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러한 지역은 역사적으로 문화, 경제적으로 워낙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묶기 어려워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통적인 중국 지역에서도 여전히 세 축을 중심으로 한 지역 간의 힘겨루기, 갈등 현상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서안(西安), 북경(北京), 남경(南京)이라는 삼각구도로 나타나는 세력의 부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면,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이후 세기의 재판으로 알려진 4인방 재판과 최근의 보시라이(薄熙來, 1949년~) 재판을 삼각관계의 시각에 투영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인방 재판은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1976년)이 죽은 후에 북경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았던 4인방에 대한 남부의 공격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보시라이의 재판은 그가 활동한 중심지가 서부 지역인 사천(四川)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서부 지역에 대한 남부 지역의 공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천에 근거를 둔 저우융캉(周永康, 1942년~)의 몰락도 역시 같은 시각을 가지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마오쩌둥 이후에 남부 지역이 중심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고, 이에 대하여 서부와 동부가 끊임없이 대결하려는 모습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동안 중국 역사는 서부 중심으로 오랫동안 움직여 왔고, 다시 동부 지역으로 갔다가 이제 남부 지역으로 옮겨 왔다고도 볼 수 있으니, 역사 속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모습이긴 하지만 지역갈등이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은 겉으로는 하나의 국가가 통일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는 끊임없이 서부와 북부 그리고 남부라는 세 핵 사이에 지역적 갈등이 존재하고, 여기에서 비극적인 사건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인다. 물론 이러한 시각을 현대에까지 적용하기 위해서는 현대 중국을 움직인 사람들에 대한 지역적 분석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러한 시각만을 남겨둔 채 마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