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이며 문학박사다. 한국사학사학회 명예회장이기도 하다. 이상현(아호_玄谷)은 1940년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서 태어나, 서울중고등학교 재학 당시, 학교 담을 넘어 YMCA에서 만나던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영향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하였다. 4?19 때 교수단 데모를 실제로 이끈 우관 이정규 성균관대학교 총장의 조언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역사철학을 연구, 1966년에 〈베네데토 크로체의 역사사상〉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역사학을 강의하다가 1973년 공군대위로 전역한 후, 2년간 시간강사로 떠돌다 1975년 9월에 숭의여자전문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때에 R.G.콜링우드의 《역사학의 이상》을 번역했고, 《자유?투쟁의 역사》를 발표했다. 1980년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학보사주간, 2부 교학처장, 학생처장 등을 역임하면서 《역사철학과 그 역사》를 출간하였고, 김성식 교수의 권유와 지도로 경희대학교에서 〈신이상주의 역사사상〉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86년 보직을 사퇴하고 1년간 미국 버클리대학 객원교수로 갔다 온 뒤, 15년간 강의와 논문 저술 활동에 열중하여 《지성으로 본 세계사》, 《역사적 상대주의》, 《다시 쓰는 역사, 그 지식의 즐거움》 등을 펴냈으며, 1997년부터는 문필계에 뛰어들어 수필가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역사 에세이집 《역사 속 사랑 이야기》, 수필집 《아버진 홍은동 이발쟁이었다》를 발표하였다.
신라가 멸망한 것은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왕조가 자연수명을 다한 뒤에 오는 노쇠현상으로 자멸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발생한 후삼국의 싸움이라는 것은 세계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내란에 불과한 전쟁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한국사람들이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치룬 것으로 자책하고 있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이것은 조선인은 자력으로 통치도, 외민족의 침략에 대한 방어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선전하려한 일제식민사학에 입각한 교육의 잔재다. 1강 세계적한국사38강을 시작하며 ---p.27
이들은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 했더라면, 만주가 우리의 땅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강국으로 그 위엄을 떨칠 수 있었을 터인데.’ 라는 가정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에서 가정법이란 통하지 않는 것인데, 그런 가정을 해보는 것은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서 그동안 겪은 민족의 설움이 이른바 민족사관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3강 민족사관과 한국사의 정체성 ---p.45
신라의 외교적 입장에서 고구려, 백제는 바다 건너 수나라와 당나라 등과 다를 것이 없는 이해와 감정을 지닌 상대국들이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원근관계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국제관계에서는 인접해 있는 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보다 더 경계를 해야 할 경쟁과 투쟁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중략) 그러므로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빌렸다는 것은 단순한 외교전의 관계이지, 이를 놓고 사대주의를 운운하는 것은 그릇된 역사인식이다. 12강 김춘추는 왜 당의 힘을 빌렸나? / ---p.143
혹자는 이것(사대교린 정책)을 조선이 명나라 황제에게 충성을 약속한 것으로 이해하여 민족의 수치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행사로 이해한다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중략) 동아시아에서 충이란 것은 천자에 대한 사상적이고 종교적인, 조건 없는 믿음과 충실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천자와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조선의 자존심이기도 하였다. 21강 배불숭유 정책과 사대교린 정책 / ---p.226
우리는 지금 민주정치라는 이름으로 정당정치를 행하고 있다. 이것과 조선의 붕당정치를 비교할 때 무엇이 더 좋은 것이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인가? 민주정치는 영국에서 비롯되어 서양에서 발전한 것이니 좋은 것이고, 조선의 붕당정치는 그것이 선거 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정당이 중심이 된 정당정치가 아니라서 나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