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_계란 한 판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짧은 침묵)
계란 한 판…(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치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방 안쪽에서 조용히 시를 쓰던 시인은 불현듯 세상의 바깥에서 큰 소리로 다가오는 계란장수의 확성기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인은 시의 원천인 운율, 곧 소리에 예민한 시인답게 계란장수의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호객소리를 그 악보라도 본 듯 리얼하게 파악하고 재현합니다. 그런 그가 분석하듯이, 받아 적듯이 계란장수의 호객소리를 파악하고 나서 내놓은 결론은 “여백의 미”가 절묘하게 구사되고 있다는 점과 그런 미학 속에는 만만치 않은 내공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자기 생의 아티스트라는 말이 있듯이, 계란장수도 고달프지만 자신의 생을 길 위에서 만들어가는 인생의 예술가요, 그 생이라는 예술 구현의 한 현장이 고달프지만 감동적인 운율로 확성기의 호객소리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민첩하게 포착한 것이고, 그것을 위와 같은 시의 창작으로써 우리들과 공유하고자 한 것이며, 그런 생에의 깊이 있는 인식이 그로 하여금 ‘계란 한 판의 리듬’에 이끌려,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서서 계란 한 판을 사게 만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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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찬호_채송화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수염으로 포도씨만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쪼그려 앉아 마당이라는 책 속의 채송화 나라를 살펴보는 일은 아름답습니다. 그 채송화 나라를 관찰하며 시인은 마당의 이쪽에서, 채송화 나라가 있는 저쪽에까지 가는 데엔 구두 한 짝 정도 크기의 배만 타고 가면 된다고 동화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채송화 옆에 누군가 오래 전에 버린 구두 한 짝이 놓여 있나 봅니다. 채송화 옆에는 깨진 거울 조각도 있나 봅니다. 인간들이 함부로 버렸으나 그 나름대로 조용히 자리 잡은 이 깨진 조각거울을 시인은 채송화 나라의 호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채송화 옆에는 고양이도 있나 봅니다. 그런데 고양이만이 아니라 비둘기도 채송화 나라에 왔다 간 흔적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그 옆에 똥을 눔으로써 그것으로 “헌사”를 바쳤습니다.
시골집 마당에서 쪼그려 앉은 채로 채송화의 나라에 얼굴을 대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시골집 마당가에 작은 소인국을 예쁘게 차려놓은 채송화의 나라도 또한 눈에 밟힙니다. 이런 삶 속에 맨살을 그대로 부드럽게 내놓고 있는 시골집의 흙마당, 그런 곳의 한쪽에 아주 작지만 예쁜 나라를 이룬 채송화들, 그런 나라들을 책처럼 소중히 다루며 그곳에 얼굴을 파묻고 작은 글씨를 읽어가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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