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공부를 잘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조선 시대 500년을 통틀어 한 개인으로 장원급제를 가장 많이 한 ‘시험의 달인’, 아니 ‘수석 합격의 달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율곡은 무려 아홉 번에 걸쳐 장원급제를 했는데, 29세에 마지막 아홉 번째 장원을 한 후 말을 타고 거리를 나서자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어린아이들까지 나와 율곡을 우러러보며,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칭송했다. (…) 이를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해본다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수석으로 합격해서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를 모두 수석 합격하고 연수원까지 수석으로 졸업한 셈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율곡이 실천하고 가르친 공부법은 그 저술만큼이나 다양하고 풍성하지만, 굳이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라고 누가 필자에게 묻는다면 단 세 글자로 율곡이 그토록 강조한 ‘교기질(矯氣質, 기질을 바로잡음)’이라 답하겠다. 이외에도 다룰 내용이 많아 ‘교기질’ 하나만을 두고 대표 방법이라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교기질이 율곡의 모든 공부법을 아우르는 연결 고리로 중핵에 해당하는 키워드인 것은 사실이다. 교기질을 현대 언어로 풀이하면, ‘공부 잘하는 기질이 있고 누구나 그 기질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롤로그」중에서
《격몽요결》에서는 마음만 있을 뿐 실천이 따르지 않는 부실한 입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뭇사람들이 스스로 입지를 말하고도 즉시 공부에 힘쓰지 않고 미적거리고 누군가 도와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명목만 입지를 내세웠을 뿐, 실제로는 학문을 향한 뜻이 없는 까닭이다. 진실로 내 뜻이 학문에 있다면, 어진 마음이 나에게서부터 나오는 것이니 하고자 하면 이를 수 있음인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겠으며, 어찌 후일을 기약하겠는가? 입지가 귀한 이유는 즉시 공부를 시작하여, 미치지 못할 것을 염려하며 일념으로 생각하여 물러서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혹여 뜻이 불성실하고 두텁지 못하여 날만 보낸다면, 나이가 들어 죽는 날까지 무슨 성취를 이루겠는가?”
요약하면 부실하지 않은 진정한 입지는 누군가 도와주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입지는 뜻을 성실하고 돈독하게 하여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일념으로 뜻한 바에 이를 때까지 매진하는 것이다. ---「입지 공부법」중에서
‘입지 공부법’을 요약하면 입지는 자신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구체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계획하는 것이다. 율곡은 여행가가 길을 떠나기 전에 지도와 나침반을 준비하는 것처럼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입지를 분명하게 세우고 시작하라고 했다. 이 입지로부터 공부를 시작하면 중도에 방황하고 흔들려 포기하거나 시간을 허비하는 일을 현격하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입지 공부법」중에서
그렇다면 교기질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일까? 《격몽요결》에 나와 있는 교기질에 대한 내용이다.
“사람이 지닌 용모는 추한 것을 아름답게 바꾸기 어렵고, 타고난 힘이 약한 것을 강하게 바꿀 수 없으며, 신체 역시 단신을 장신으로 바꿀 수 없다. 오직 사람의 마음과 뜻만은 어리석은 것을 지혜로운 것으로 바꿀 수 있으니, 불초한 것을 현명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의 타고난 마음이 허령(虛靈, 비어 있고 신령함)하기에, 타고난 천품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지혜로움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으며, 현명함보다 귀한 것은 없다. 어찌 현명하고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을 훼손하며 괴로워만 하는가? 사람이 자신의 의지를 분명히 갖고 굳건히 물러나지 않는다면, 즉시 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여기서 ‘허령하다’는 것은 인간 본성이 천리(天理)에서 왔음을 의미한다. ‘교기질’은 이러한 허령한 인간 본성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교기질 공부법」중에서
교기질을 해서 즉, 공부하는 체질로 바뀌어서 공부가 일취월장하기도 하고, 교기질이 완전히 되지 않았다 해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즉, 학문을 성실하게 궁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질이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공부에 성실하면 본성이 밝아지고, 본성이 밝아지면 공부에 성실하게 되는 이치다. 교기질과 공부는 어느 것을 먼저 끝내고 다음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병행해야 하는 것이다. ---「교기질 공부법」중에서
율곡이 언급한 구습 조목들 중 일부를 다시 살펴보면, 첫째 항목으로 구속을 극히 싫어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다루었다. 구속은 모두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공부할 때는 적당한 구속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지키기로 한 약속이나 규칙도 일종의 구속이다. 구속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성장통은 늘 있는 법이니 공부에도 적당한 구속은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또 공부든 일이든 간에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남의 눈치를 보느라 올바른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의미에서 셋째 항목은 숙고해볼 만한 대목이다.---「혁구습 공부법」중에서
율곡은 학인이 지녀야 할 자세를 이야기할 때, 앉을 때는 손을 모아 단정히 앉고, 걸음걸이는 침착하게 걸으며, 말은 신중하게 하고 일거일동을 경솔히 하지 말라고 했으며 실제로 자신의 생활 태도를 이같이 실천했다. 현대인들이 이 자세를 엄격하게 지키기는 어렵겠으나 절도 있고 신중한 태도가 정신 집중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율곡은 방만한 마음을 모아 집중해야 제대로 학문을 할 수 있는데 그리하려면 태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공자가 말한 아홉 가지 바른 몸가짐과 아홉 가지 생각을 의미하는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강조했다(구용은 《예기》 〈옥조玉藻〉편, 구사는 《논어》 〈계씨〉편). 구용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지침으로 좋고, 구사는 학문을 진전시키고 지혜를 높이는 데 적절하고 필요한 태도라고 역설했다. ---「구용구사 공부법」중에서
돌이켜보면 율곡이 스무 살 나이에 금강산에서 내려왔을 때의 상황은 지극히 암담했을 것이다. 계모는 여전히 상식 밖의 행동을 일삼아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고 가족들과 불화했다. 아버지는 몸져누워 집안 형편은 어렵고, 본인은 1년을 넘게 방황하다 돌아와 불교에 입문했다는 낙인만 남아 출셋길이 캄캄한 상황이었다. 성혼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밝힌 것처럼 신분 제도에 가로막혀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 어쩌면 율곡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부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적당한 성적을 내고 적당히 합격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랬다면 가문이 특별히 좋은 것도 아니고 지나온 이력도 깨끗지 못하니 여기저기 치이다 하급 관리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을 것이며, 그랬다면 가정의 평화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금성옥진 공부법」중에서
율곡의 독서법에는 독특한 특징이 눈에 띄는데, 바로 일목십행이다. 성혼과 문답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율곡이 성혼에게 물었다.
“형은 글을 볼 때 몇 줄을 한 번에 보아 내려가는지 모르겠소.”
“7?8줄 정도로 읽소.”
“나 역시 10여 줄에 불과하오.”
두 사람이 겸손하게 이야기했지만, 한 번에 열 줄씩 본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양으로, 율곡이 속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후학들은 이러한 율곡의 독서법을 일컬어 ‘일목십행(一目十行)’이라 불렀다. 한 눈에 열 줄을 본다는 뜻이다. 율곡과 관련하여 전하는 일화를 살펴보면, 율곡이 무릇 책을 볼 때는 남과 이야기하면서도 책을 두루 펼쳐보면서 그 대강을 폭풍우처럼 빨리 보아 넘기는데 이미 그 대의(大意)를 터득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속독한 이후에는 거듭 읽으면서 숙독하는 방법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교모범》에서도 한 책을 충분히 숙지한 후 바야흐로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고 언급했듯이, 율곡의 실천적인 독서법도 그러했다. ---「일목십행 공부법」중에서
장원급제의 마지막 비결로 선한 마음으로 공부하라는 것을 들고 싶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는 것과 선한 마음으로 하는 것은 다르다. 율곡은 생계와 콤플렉스로 인해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했지만, 종국에는 성현이 되고 백성을 돕겠다는 선한 마음은 잊지 않았다. (…) 사람은 독한 마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오래 버틸 수가 없다. 그 독이 먼저 자신을 해치기 때문이다 (…) 공부라는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선한 마음과 덕성이 누구보다 필요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도 잘되고 우리 가족 우리 이웃도 잘되게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율곡이 평생토록 학문을 지속하고 수백 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대학자가 된 것도 선한 성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곡이 살았던 삶을 통해서 증명된 것이기도 하다. ---「지어지선 공부법」중에서
율곡이 세상을 떠나던 순간을 그려보면 이런 것이었다. 향년 49세, 율곡이 숨을 거둔 것은 한양의 대사동이었는데, 이미 연초부터 몸이 쇠약해져 병으로 몸져누웠다고 한다. 그런데 1584년(선조 17년) 정월 14일, 죽기 이틀 전 서익(徐益)이 순무(巡撫,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백성을 돌보는 것)어사로 발령받아 북도를 안찰(按察, 자세히 조사하고 살피는 일)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북방에 대한 방략을 알려주려 하였다. 이에 제자들은 병환을 염려하여 만류하였다.
그러나 율곡은 “이는 국가의 대사니, 내 어찌 신병을 염려하여 이 중요한 시기를 놓치겠는가?” 하며, 부축을 받고 앉아서 입으로 불러주며 아우 우(瑀)를 시켜 기록하게 하였다. (…) 남은 생명을 다 짜내어 [육조방략]을 모두 읊고 나자 숨이 곧 끊어지려 하더니 병이 점점 위급해졌다. 이후 16일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숨이 끊어질 듯하면서, 꿈을 꾸는 것처럼 순순히 정성스럽게 타이르듯 말을 하였는데 하나같이 국사(國事)에 관한 것이었다.
정철이 와서 문병하자 그의 손을 꽉 잡고 사람을 등용할 때 치우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새벽에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도록 눕는 자리를 바꾸라고 한 다음, 의복과 두건을 단정히 하고, 조용히 서거하였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