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가 ‘나’라고 일컫는 자기 존재는 과연 어떤 ‘나’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지 이해관계를 살피고,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해주는지 이기적 욕심 추구에 몰두하는 ‘나’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옳은 일인지 정의로움을 찾아가고 어떻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지 이타적 배려를 하는 ‘나’인가? 결국 ‘나’라는 존재도 내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가치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로 각성되고 실현될 수 있다. 고급스런 옷을 입거나 명품 가방을 들고 다녀서 돋보이는 ‘나’와 마음 씀이 따스하고 너그러우며 생각이 맑고 깊어 돋보이는 ‘나’는 전혀 품격이 다르다. 17쪽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자기 속의 양심을 잘 키워가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사랑할 수 있고, 자기를 가르쳐 준 스승을 사랑할 수 있으며, 조국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스승을 존경하고 조국을 사랑하라고 아무리 도리를 따져 가르쳐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자기를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기를 저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일을 할 수 없다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맹자」7-10:1고 했다. 해방 후 한때 서울 홍파동에 있었던 율곡栗谷의 사당 앞 석벽에 율곡의 글씨로 새겨 놓은 구절이 있다. “성품은 저 아래 물속의 물고기에서 저 높이 하늘 위의 새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으니, 나의 사랑이 저 멀리 산골짜기까지 가서 머문다. 性同鱗羽, 愛止山壑.”는 구절이다. 진실로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마치 어느 산골에서 솟아난 샘이 끊임없이 넘쳐흘러 멀리 바다까지 이르는 것과 같고, 잔잔한 물 위에 던진 돌의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점점 넓게 퍼져서 호수의 끝에까지 이르는 것과 같다. 이처럼 그 사랑은 인간이 사는 세상을 모두 적셔 생명이 싹트게 하고, 나아가 자연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사랑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아니겠는가. 21-22쪽 우리 마음에는 욕심을 따르는 ‘인심人心’과 도리를 따르는 ‘도심道心’이 있다고 한다. 정약용은 인간의 마음을 ‘인심’과 ‘도심’이 싸우는 전쟁터라 했다.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은 이 전쟁터에서 ‘인심’을 제거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도심’이 ‘인심’의 고삐를 잘 붙잡고 통제할 때 성숙한 인격을 갖춘 인간이 될 수 있다. 절제된 욕심은 인간의 미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순자荀子는 욕심을 제거하거나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을 이끌고 절제하는 방법을 추구하도록 제시했다. “다스림을 말하면서 욕심을 버리기를 기대하는 자는 욕심을 바르게 인도할 줄 모르면서 욕심이 있는 것을 곤란하게 여기는 자이다. 다스림을 말하면서 욕심을 적게 하기를 기대하는 자는 욕심을 절제할 줄 모르면서 욕심이 많은 것을 곤란하게 여기는 자다. 凡語治而待去欲者, 無以道欲而困於有欲者也, 凡語治而待寡欲者, 無以節欲而困於欲多者也.”「荀子」, 正名篇. 69-70쪽